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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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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의사 사회 성윤리의 현주소를 논하다

병원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현직 의사와 의대생 5인의 좌담…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에 데자뷔 느꼈다” “문제제기의 창구 만들고 자정작용 있어야”
등록 2011-09-21 17:03 수정 2020-05-03 04:26
서글픈 일이었다. 좌담에 참석한 여성 의사와 의대생들은 신분 노출을 꺼렸다. 두려운 것은 학교와 병원에서 ‘찍히는’ 일이었다. 의사 사회의 치부를 외부에 나와 공개적으로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병원 사회를 둘러싼 높은 담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지난 고려대 성추행 사건만은 아닐 터였다. 어렵게 이들을 섭외한 자리에서 그 사건에 대한 소감부터 물었다. 사회에서는 이미 ‘지나간’ 이슈지만, 병원 안 성희롱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었다. 좌담에 참여한 이들 사이에서도 말은 꼬리를 물었다. 주제에 따라 의견도 미세하게 엇갈렸다. 이 의견들이 모인 어느 좌표쯤에 우리나라 의대와 병원의 현주소가 있을 것이었다.
좌담 참가자에게 미칠 수도 있을 불이익을 고려했다. 이름, 소속 학교, 학년 등 신분을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지면에서 지웠다. 참고로 참가자 2명을 제외하고는 서로 몸담은 의료기관이 달랐다. 5명 가운데 1명은 의대 성희롱 문제를 걱정하는 남성이었다. 병원의 성희롱 문제가 비단 여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_편집자
» 의과대학의 남성 중심적 문화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지난 9월7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 모인 여성 의료인들은 고려대 의대생 출교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참가자의 신분 노출을 방지하려고 사진을 흐릿하게 처리했다. 한겨레21 정용일

» 의과대학의 남성 중심적 문화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지난 9월7일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 모인 여성 의료인들은 고려대 의대생 출교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참가자의 신분 노출을 방지하려고 사진을 흐릿하게 처리했다. 한겨레21 정용일

*좌담 참가자(모두 가명):
이수현(수련의 수료)
김민성(전공의)
최은수(의학전문대학원 학생)
임상희(의학전문대학원 학생)
정우리(의과대 본과 학생)



지난 고려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소감은.
이수현(이하 이): 처음에 뉴스를 듣고 곧 묻힐 거라고 생각했다. 의대 분위기를 생각하면 보통 그렇기 때문이다. 대부분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일이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슈가 한동안 관심을 받아서 오히려 더 놀랐다.

김민성(이하 김): 의사의 성희롱 관련 사건·사고가 계속 있었다. 최근에도 내시경을 받은 여자 환자가 성폭행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소식을 접하면서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기사가 더 선정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없던 일로 하자, 잘못하면 찍힌다”

최은수(이하 최): 누구나 사고를 칠 수 있다. 그래도 가해자가 깊이 반성한다면 다시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 갈수록 가해자들이 못된 짓을 하더라.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게 갈수록 문제가 커진 이유라고 생각했다.

임상희(이하 임): 뉴스를 접하고 분노했다. 의대생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둔감하다. 뉴스도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이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 일에는 관심이 컸다. 가해자가 출교당해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정우리(이하 정): 충격이 컸다. 고대 성추행 사건은 의대 동기 사이에서 일어났다. 의대에서 동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워낙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여자 동기를 친구가 아닌 도구로 본 듯하다. 남자 동기들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남자들은 오히려 “남녀가 술 먹고 나면 그럴 수 있지”라고 하더라.

»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들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학생들이 지난 9월1일 오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고려대 의대생 가해자들에 대한 출교 조처를 요구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고려대는 여론이 악화되자, 지난 9월6일 가해 학생들에 대해 출교 결정을 내렸다. 한겨레 박종식

»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들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학생들이 지난 9월1일 오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고려대 의대생 가해자들에 대한 출교 조처를 요구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고려대는 여론이 악화되자, 지난 9월6일 가해 학생들에 대해 출교 결정을 내렸다. 한겨레 박종식

소속 병원에서도 성추행이나 성희롱 사건이 있었나? 있었다면 어떻게 문제가 해결됐나.
(이 질문에 두 사람은 자신의 병원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다른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이 응답으로 자칫 좌담자의 소속 대학이 알려질 가능성을 고려해서, 기사에서는 당사자의 병원에서 사건이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도록 처리한 채 사건의 내용만 소개한다.)

이: 의대 본과 학생이 간호대 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남학생이 여학생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벌어진 일이다. 형사사건이 됐다. 가해자는 학교를 그만뒀다. 여학생도 학교를 떠났다. 학교나 과에서 특별한 말이 없이 조용히 일을 마무리했다.

정: 남자 레지던트가 실습 나온 여학생의 손을 잡고 어깨도 주물러달라고 했다. 학생이 참다 못해 동기들 대상으로 서명을 받았는데, 동기들이 거부했다. 학생회 간부도 나섰지만 결국 서명을 받지 못했다. 동기들은 “어차피 우리는 본과생이고 저쪽은 레지던트 4년차다. 잘못하면 우리가 단체로 찍힌다”는 태도였다. 그 과정에서 여학생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임: 회식 자리에서 레지던트가 옆에 앉은 여학생의 팔을 혀로 핥았다. 여학생이 놀라서 따지려고 했는데, 여학생의 동기들이 말렸다. 의대에서는 윗사람에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물론 극단적인 사례지만, 학교에서 회식을 하다 보면 교수나 레지던트가 예쁜 여학생에게 술을 따르라고 할 때도 있다.

김: 교수 1명이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레지던트의 치마에 손을 넣었다. 학생회에서 문제제기를 하려 했는데 피해자가 반대했다. “여기서 의국 생활을 더 해야 한다. 교수가 그만둘 일은 없으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교수야 어차피 술을 깨면 기억을 못할 테니, 그냥 지나가자는 말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있는 교수들은 병원 스태프들 사이에서 정보가 인수인계될 뿐이다. 알아서 피하라는 거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해도 피해자는 보호도 안 되고, 문제가 공론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고려대 사건은 가해자가 동기여서 그나마 알려진 걸까. 가해자가 선배나 교수면 피해자가 침묵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임: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졌거나 일부에서 문제제기를 했던 일들은 말이라도 번진다. 그렇지만 소리 없이 덮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정: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서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피해자들이 나서서 말을 하지 않으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피해 사실 공론화 힘든 철저한 권위 사회

의대에서만 유독 이런 일이 많은 걸까.
이: 다른 사회에 몸담지 않아서 비교하기 힘들지만, 의대라고 특별히 심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임: 같은 생각이다. 의대 사회에서 성범죄율이 더 높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성폭력 사건이 생겼을 때, 2차 피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의사 사회가 폐쇄적이다. 한번 의대에 들어오면 의사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선배·동기·후배들을 계속 봐야 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의대 사회가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묻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그 속에서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할 수 있다.

정: 의대는 다른 과와 다르다. 한번 학교에 들어오면 계속 서로 보게 된다. 게다가 모교에 의료진으로 남으면 선후배를 평생 본다. 그러니 윗분들이 더욱 어렵다.

이: 성범죄는 한 사회 안의 권력관계에서 생길 때가 많다. 그런데 의대에서는 권력이 교수나 선배들에게 심하게 편중돼 있다.

최: 의사 사회는 군대에 비교될 정도로 권위적이다. 그러나 성범죄는 윤리의 문제다. 즉, 다른 집단보다 권위적이지만 윤리의식이 떨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김: 의사에게 기대하는 윤리가 있다고 본다. 의사는 몸을 다루는 전문직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높은 수준의 성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기대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고려대에서 생긴 사건으로 그런 기대가 깨졌다. 사실 병원 사회를 돌아보면, 내부 교육에서 생명윤리나 성윤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문제가 이번에 드러났다.

최: 의사는 직업 이름에 ‘스승 사’(師)자가 붙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다. 그런데 그에 합당한 윤리 교육을 받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지식을 빨리, 많이 배우는 것에 교육이 집중돼 있다. 어떤 의사가 될지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다.

김: 생명윤리에 대한 수업이 있긴 하다. 본과 4학년 때 1학기 동안 배운다. 물론 과학자로서의 학문적 윤리에 관한 부분이 많다.

이: 학교에서는 주로 의사-환자 관계의 윤리를 배운다. 성윤리는 배우지 않았다. 물론 커리큘럼만이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더 크게는 내부의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다.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바로잡을 장치가 없다. 이번에도 고려대나 의사 사회 내부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론의 압력에 밀려 출교 조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의대 사회 내부의 문화가 작용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최: 아무래도 남자가 주류다. 여성 의사가 많지 않다. 그러니 남성중심의 문화가 형성된다. 일부 의대에서는 여자들이 레지던트를 하는 동안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하거나, 출산휴가 3개월은 당연히 다 채우지 않는다. 또 인턴은 결혼을 하더라도 임신을 하지 않지 않아야 개념 있다는 말을 듣는다. 과에 따라 여성 레지던트를 기피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만 탓할 수는 없다. 일이 너무 빡빡해서 일손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스템의 문제도 있다. 분명한 건 그 속에서 여자들이 힘들다는 사실이다.

정: 학교마다 분위기가 좀 다르다. 남녀 차별 없이 100% 성적순으로 레지던트를 뽑기도 한다. 그래서 과에 따라 여자가 정원을 모두 채우기도 한다. 인턴들이 출산휴가를 3개월 다 가기도 하고, 레지던트가 아이를 2명 낳는 경우도 있다. 내가 본과생이라서 현장의 차별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임: 학부에서 다른 전공을 했다. 그때 남학생의 비율이 의대보다 더 높았다. 의대라고 해서 특별히 더 남성중심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단순한 결론이겠지만, 어디를 가나 남자가 많으면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언어폭력과 여성차별적 분위기

김: 요즘 의대에 여성이 많이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자 교수들의 비율이 높다. 선생님들이 남성 위주의 의대 문화를 만든다. 의대는 상명하달의 문화가 강하다. 이런 환경에서 선생님들은 수업 내용 속에 가부장적인 말을 끼워서 가르친다. 특히 언어 성폭력이 심하다. 예를 들면 뇌신경 12가지를 외울 때,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to touch and feel girl’s vagina…’(여성의 성기를 건드리고 느끼기) 같은 문구를 참고 삼아 가르친다. 또 해부학 교실에서 여성 성기 얘기가 맥락 없이 자주 등장한다. 과거에 형성된 남성중심의 폭력적 문화가 공식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선생님들은 복잡한 암기를 돕고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하려는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수업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간호사의 옷을 벗길 수 있다는 식의 얘기도 한다. 자신들의 언어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것 같다.

정: 물론 그런 교수들의 수는 많지 않다. 어쩌다 한두 명 있을 뿐이다.

이: 그런 교수들은 ‘사이코다. 조심해라’라는 식으로 학생들끼리 수군댄다.

임: 요즘엔 선생님들이 조심하는 것도 느껴진다. 아무래도 의대에 여학생 비율이 높아진 것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각자 몸담은 병원에서 고려대와 같은 일이 생겼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정: 글쎄, 각자는 분노하겠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 나서지 않는 한 조용히 지나가길 바랄 듯하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실망스럽겠지만, 내가 피해자라도 아무런 말 안 했을 것 같다. 문제를 감당하고 살 용기가 없다.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도 없다. 그래서 고려대의 피해자가 정말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

임: 고려대에서 출교 결정을 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학교에 다니지만 나라도 나서서 가해자들의 출교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그런데 여자 동기들 몇몇은 ‘피해자인 여자애가 워낙 헤프다고 하더라’라는 식의 근거 없는 소문을 그대로 옮기기도 했다. 물론 소수 의견이었지만 안타까웠다.

최: 고등학교 때 공부만 하던 친구들이라서 ‘내 공부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친구들이 신문이나 시사잡지를 잘 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모른다. 한나라당이 여당인지 모르는 친구도 있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적 연령이 낮아진다는데, 그런 부분이 있다고 본다.

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가 있을 때 시비를 걸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모르니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르지 않을까.

정: 개인적인 생각인데 의대 남자애들은 대체로 연인관계나 연애를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공부를 하면서 빡빡하게 살다 보니 여자의 몸을 학문적으로만 접한다.

김: 여성의 성에 대한 감수성이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낮은 부분이 있다.

정: 최근 분만실에서 남학생들이 실습하는 것을 두고 산모가 인터넷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그게 이슈가 됐다. 이에 대해 여자 동기들은 산모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반응했다. 그런데 남자애들은 산모도 병원에 왔으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더라. 여자의 수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려대 사건의 내용을 봐도 좀 이상하다. 가해자들은 디지털카메라로 피해자의 몸을 수십 번 찍었다. 무언가 변태적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 의사는 몸을 의료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매일 환자의 신체를 보면서 성적인 느낌을 받는다면 의사로서 일을 할 수 없다. 우리 학교에서도 해부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경건하게 대하라는 교육을 받는다. 사람의 몸을 대상화하면서 동시에 존중하라는 취지다.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다. 고려대 친구들은 그 부분에서 큰 착각을 했다고 본다.


의사 사회 내 성범죄 처벌 시스템 만들어야

고려대와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최: 의사 사회에서 자정작용을 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다. 고려대 사건에 대해서도 의사협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고려대도 학생들을 감싸다가 여론에 떠밀려 출교 조치를 했을 뿐이다.

정: 한 국회의원이 의사가 성범죄를 저지르면 의사 자격을 박탈하자는 법안을 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의사협회는 이를 반대하고 있다. 성범죄자를 감싸려는 게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은 환자가 의료진을 압박하는 용도로 악용할 수 있다는 근거다. 그러면서 전문가 집단에서 자정작용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과연 의사협회에서 그런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 의사협회가 우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일단 많은 이들이 자기검열에 부딪힌다.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할 창구도 없다. 그러니 제도로 보호받지도 못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 의대가 확실히 이런 문제에 무디긴 하다. 고려대에는 그나마 양성평등센터가 있다. 그런데 사건이 터진 다음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라고 했다고 들었다. 피해자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이다.

최: 가장 먼저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사람 하나하나가 바뀌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도 필요하다. 성폭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2차 피해가 크다고 들었다. 정서적 배려가 없으면 마음의 상처가 클 수밖에 없다. 의사들이 그런 피해자를 섬세하게 돌봐야 하는데, 정작 앞가림도 못하고 있다. 문제가 크다. 그래서 피해자 학생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본다. 고맙고, 미안하다. 앞으로 ‘고려대 봐라. 출교당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선례를 남겼다고 본다.

정: 좋은 생각이 났다.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 항목에 성폭력에 대한 문제를 넣으면 어떨까.

일동: (웃으며) 좋은 생각이다.

김: 생각은 안 바뀌더라도 적어도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바뀌겠네.

감사원 자료를 보면, 성폭력 범죄로 입건된 의사 수는 2006년 35명, 2007년 40명, 2008년 48명이다. 물론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크다. 현행 의료법상 성범죄는 의사 면허 취소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성범죄자는 1년 이하의 면허정지 기간이 지나면 다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글 김기태 기자 kkt@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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