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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지혜,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딸 전순옥씨 증언으로 재구성한 이소선의 삶…20여년 전부터 8시간 노동·일자리 나누기 제안도
등록 2011-09-21 15:50 수정 2020-05-03 04:26
살아생전의 이소선씨 모습. 2008년 12월 서울 창신동에서 찍었다. 신산한 삶이 드리워진 노란색 옷이 곱다. 한겨레21 정용일

살아생전의 이소선씨 모습. 2008년 12월 서울 창신동에서 찍었다. 신산한 삶이 드리워진 노란색 옷이 곱다. 한겨레21 정용일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 9월3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또 다른 이,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가 여기 있었다. 9월15일 열사의 누이동생이자 어머니의 딸인 전순옥(57)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를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서울 동대문지하철역 근처 수다공방 사무실 창문 너머로 오빠가 일하던 평화시장이 설핏 보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딸이 쓰는 어머니의 행장(行狀)’으로 재구성했다. 그가 말하는 어머니 이야기는 길었지만 지루하지 않았고, 무겁지만 가라앉지 않았고, 아름다웠지만 눈부시지 않았다. 기사를 쓰느라 덜어낸 것은 있어도 더한 것은 없다.

어머니는 오빠 바로 위에 누우셨어요. 오빠 추도식을 갈 때마다 항상 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던 자리였죠. 아들 옆에 계시니 좋으시죠. 41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묘지는 허허벌판이었는데 그새 묘가 너무 많아졌네요. 어머니까지 벌써 거기에 가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어머니 빈소에 참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기회가 없네요. 저희 가족이 가지고 있던 이런저런 생각을 하나하나 모아서 잘 마무리해주신 장례위원회 분들도 아주 고맙지요.

구류 처분만 180회…연행·단식·농성의 삶

빈소에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났어요. 어머니가 정말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오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지요. 모두 이야기가 있는 만남이었죠. 엄마·아빠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온 어느 꼬마 초등학생은 “할머니를 만났는데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했죠. 어느 대학생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고 달려 왔죠. 오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 소식을 듣고 놀라서 왔다고 하네요. 참 고마웠어요. 옛날 우리 동네에 살던 친구 동생도 왔어요. 헤어진 지 37~38년 만에 어머니때문에 만나게 됐네요. 오빠를 그린 만화책을 본 아이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엄마·아빠를 데리고 오기도 했어요.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분들, 어머니가 사랑하셨던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어머니가 병상의 오빠와 한 마지막 약속을 말이죠. 오빠의 부탁이 어머니에게 힘이 되었을지, 때로는 먼저 떠난 아들도 못한 일을 나이 든 어미에게 떠넘겼다는 원망을 하셨을지. 어머니는 참 긍정적인 분이셨죠. 고생을 너무너무 많이 했는데도 말이죠. 어머니가 받은 구류 처분을 세어보았더니 180번이나 되던데요. 경찰서에 잡혀간 것만 수백 번, 찬 바닥 농성과 단식은 삶이었죠. 아들까지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고 살았으니 어머니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을 거라고 모든 사람은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손자들한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죠. 아픔을 가지고 살아오시면서도 원망을 받아들여서 좋은 기운으로 바꿔가시는 분이셨어요. 그 긍정의 힘은 신앙심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따라 조금이라도 일찍 세상에 대해 눈뜨게 된 데서 나온 거 같아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더라는. 그분들을 만나서 얘기하고 안아주고, 그 사람들이 힘을 얻는 속에서 어머니도 다시 힘을 얻으셨던 거죠.

전순옥씨는 처음으로 어머니 없는 한가위를 보냈다. 어머니가 없는 서울 창신동 작은 집은 휑하니 커 보였다. 오는 9월24일에는 어머니를 담은 다큐멘터리 시사회가 열린다. “가족들이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못 볼 거 같아요.” 한겨레21 박승화

전순옥씨는 처음으로 어머니 없는 한가위를 보냈다. 어머니가 없는 서울 창신동 작은 집은 휑하니 커 보였다. 오는 9월24일에는 어머니를 담은 다큐멘터리 시사회가 열린다. “가족들이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못 볼 거 같아요.” 한겨레21 박승화

어머니에게 평화시장이 어떤 의미였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평화시장은 고향이 되어버렸죠. 그 자리가 마음속에 너무 크게 자리잡은 탓이죠. 많은 사람들이 왜 어머니를 자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렀을까요. 청계천변 사람만이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익환 목사님도 그렇게 부르셨죠. 어머니는 자식들이 잘하건 잘못하건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존재잖아요. 어머니는 그런 존재로 살아오셨어요. 정작 당신의 자식들은 어머니한테 불만이 많았죠. 우리만의 어머니가 아니었으니까요. 어려운 이, 아픈 이가 있는 곳, 투쟁이 있는 곳에는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셨죠. 순덕이가 어릴 때 써놓은 글을 기억하시나요. “나도 아침에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죠. 1979년 기억하시나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동일방직 ‘똥물 사건’ 연극 때문에 어머니뿐만 아니라 저까지 유치장에 갇혔죠. 그때 순덕이가 이런 글도 썼죠. “다른 집을 보면 자식들이 부모 속을 썩이는데 왜 우리 엄마는 내 속을 이렇게 썩이는지 모르겠다”고요. 많은 이들의 어머니로 살아가려다 보니 배 아파 낳은 자식들에게는 그런 일이 생겼던 거죠. 가끔 어머니한테 “엄마는 왜 우리 생일은 몰라요? 누구 추도식, 어떤 학생, 어떤 노동자는 언제 죽었는지 다 알면서 우리들 생일은 왜 모르시는 거예요”라고 물었죠. 사실 엄마는 우리 생일을 수첩에 다 적어놓으셨어요. 바빠서 챙기지를 못하셨던 것뿐이에요.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자들이 때가 되면 그 수첩에 적힌 수많은 전화번호들을 타이핑해서 새 수첩을 만들어드렸죠. 나중에 보면 새로 받아적은 것이 너무 많아서 다시 타이핑해야 했지만요.

아들 죽음 뒤 2주 만에 청계피복노조 세운 저력

1970년 11월13일,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바뀌셨죠. 오빠가 죽은 뒤 불과 2주일 만에 청계피복노조를 세워내셨어요. 노동운동을 모르고 사신 분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런 일을 하도록 몰아세운 힘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요. 그런 어머니를 보고 다들 놀랐고 너무나 궁금해했지요. 오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에게도 근로기준법을 알려드렸어요. 어머니가 “내가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느냐”고 물으시면, 오빠는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평화시장에 가보지 않으셨어도, 따로 공부를 하지 않으셨어도 노동시간을 줄이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해야 하고, 시다들의 임금을 100% 올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어머니는 참 영특한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수사기관에 잡혀가셨을 때 이런 말을 들으셨죠. “이소선이 네가 공부를 좀 했으면 나라를 다 팔아먹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꾸하셨죠. “공부를 했으면 나라를 살려야지 왜 팔아먹느냐”고요. 형사들의 말문이 막혔다죠.

어머니는 혜안이 있으셨어요. 1980년대 말부터 “8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노동시간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게 어머니의 최대 관심사였어요. 그때는 임금투쟁이 최고 목표일 때였는데 말이죠.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떤 세미나에 참석했었죠. 그날 주제가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을 나누자는 것이었어요. 네덜란드 사례가 나오기에 “저희 어머니는 1980년대 말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죠.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내가 오래전부터 그거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안 하더라”며 아쉬워하셨죠. 제가 사회적 기업을 하겠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그러셨죠. “이 업종에서 공장을 운영한다는 건 장시간·저임금으로 유지하겠다는 건데, 너는 8시간 노동을 지키면서 임금도 공정하게 줄 수 있겠니. 그게 자신 있다면 한번 해봐라. 대신 절대로 8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어머니한테는 8시간 노동이 아주 중요했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던 오빠의 영향이 컸을까요.

정부에서 어머니의 훈장 추서를 거부했다는 소식이 들려요. 오히려 잘된 건가요? 어머니는 그러셨어요. “편을 가르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겠니. 이념이 다르다, 생각이 다르다, 노조가 다르다, 지역이 다르다, 계속 편을 가르기 시작하면 편으로 조각조각날 수밖에 없다”고 염려하셨죠.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노동자끼리는 해결할 수 없지 않느냐”고.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이죠. 편을 가르다 보면 편대로 뭉친 덩어리가 생겨나기 마련이죠. 오빠가 얘기했죠. “한번 냄새를 맡고부터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피우겠다고.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그런 덩어리가 없는 세상, 용해되는 세상을 말씀하셨어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합쳐서 3일만 농성해봐라. 그러면 다 해결된다. 그게 어려우면 3시간만 해보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죠. 어머니가 눈감으시던 날에 양대 노총 위원장님들이 함께 병원에 오셨던 거 아세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통합한다고 하면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함께 오셨죠. 그런데 그날 어머니가 오빠를 만나러 가신 거예요. 두 위원장님이 어머니 손을 붙잡고 임종을 하신 것도 우연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도 두 분이 함께 오셔서 기쁘셨죠.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상징인 청계피복노조, 유신독재를 흔든 동일방직과 YH무역 노동자 투쟁,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규명 투쟁,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설립,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기륭전자·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등 굵직한 역사의 현장에는 어머니가 있었죠. 그런 어머니를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하나요? 노동운동가셨나요, 인권운동가셨나요. 아니면 민주화운동가셨나요, 사회운동가셨나요.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어머니는 익스클루시브(Exclusive)한 삶이 아닌 인클루시브(Inclusive)한 삶을 사셨어요. 자기가 발 디딘 곳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는 모든 곳, 인권이 유린당하는 곳을 모두 끌어안으셨죠. 모든 영역을 넘나드셨어요. 그래서 몸은 많이 피곤하고 아프셨죠.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흔한 노래방도 한 번 안 가셨죠. 찜질방, 목욕탕, 사우나도 못 가보셨죠. 어색하다, 집에서 씻는 게 좋으시다면서요.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항상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태일이 때보다 더 어려운 노동자들이 왜 이리 많으냐”

우리 식구 참 가난했죠. 어머니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였나요. 어머니는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것을 너무 가슴 아파하셨어요. 오빠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도 “엄마, 배가 고프다”였잖아요. 그 말을 잊지 못하셨죠. 그래도 가난 때문에 불행해하지는 않으셨던 거 같아요. 항상 행복하다고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니는 오빠를 두고 하는 인터뷰는 싫어하셨죠. 그 얘기를 하고 나면 몸이 아파서 사나흘씩 누워버리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 끊는 것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셨죠. “나같이 평생 가슴앓이로 살아가는 엄마들이 더 생겨서는 안 돼. 죽지 말고 투쟁하자. 죽을 힘을 다해서 투쟁하자”고 말이죠. 그래서 누가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쫓아가셨어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셨죠.

어머니는 하늘에서 오빠를 만나서 무슨 말씀을 처음으로 하셨을까요. 너무 반가워서 끌어안으셨겠죠. 그러면서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하셨을 거 같아요. 평소에 그러셨죠. “태일이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요. “나한테 약속을 지켜달라고 했는데, 나는 지킨다고 했는데 태일이 때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그게 너무나 마음 아프다고 말이죠. 예전에는 싸운 만큼 성취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씀도 하셨죠.

전태일의 어머니도, 전순옥의 어머니도, 노동자의 어머니도 아닌 그저 사람 이소선은 누구였느냐고 합니다. 어머니는 용기 있는 분이셨죠. 지혜로운 분이기도 했어요. 그래요. 용기와 지혜,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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