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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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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양심적 병역거부했다

등록 2001-07-26 00:00 수정 2020-05-03 04:22

대체복무제를 ‘이단의 것’이라 욕하는 이여, 막시밀리안·재세례파·존 스토트 목사를 아는가

<한겨레21> 367호에 실린 “이단의 가시관 쓴 대체복무제”라는 기사를 읽고 양심에 의한 거부권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가 제기된 초기부터 <한겨레21> 토론 게시판의 분위기가 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대립구도로 흘러가는 것을 걱정스럽게 지켜봐왔지만, 설마 기독교 보수교단이 입법의 직접적인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1999년 기독교 잡지인 <복음과 상황>에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던 입장에서, 이러한 논의의 왜곡을 그냥 지켜볼 수 없어서 나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징집 거부하다 로마 총독에 의해 처형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대체복무는 이단종파를 위한 특혜가 된다”, “병역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중전도 대상이 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깃해 넘어갈 수 있다”는 논리로 대체복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병역거부는 여호와의 증인들 같은 이단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기총을 이끌어가는 목사님들이 더 잘 알겠지만,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권은 여호와의 증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 제국 아래서 유대인들은 군입대 때 요구되는 충성서약이 황제의 신성을 인정하는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고, 로마 제국도 이들에 대한 예외를 인정한 바 있다. 기독교인으로 최초의 병역거부 순교자였던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출신의 막시밀리안은 서기 295년 징집을 거부했다가 총독의 명에 의해 즉각 처형됐다. 막시밀리안의 병역거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따른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의 발현이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병역면제와 구별됐고, 막시밀리안은 훗날 성인 칭호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리된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正戰: Just War) 이론이 교회의 기본입장이 되었고, 중세를 지나는 동안 이에 대한 별다른 이의제기가 없었다.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병역거부문제가 다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다. 개신교 주류는 가톨릭의 정전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일부 종교개혁 그룹은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대표적인 종파로 재세례파처럼 급진적인 종교개혁 그룹을 들 수 있고, 이들의 입장은 모라비안 형제단을 거쳐 메노나이트 교도들에게까지 연결된다. 메노나이트들은 특별히 네덜란드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고, 오렌지공 윌리엄은 이들로부터 일정한 돈을 받는 대신 공식적으로 병역을 면제시켰다. 18세기에는 메노나이트들 일부가 미국으로 이주,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13개 주 전체에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평화주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에 이주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이들이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펜실베이니아에는 평화주의 입장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또다른 기독교인들이 이미 정착을 끝낸 상태였다.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1680년 윌리엄 펜의 지도 아래 펜실베이니아에 도착한 퀘이커 교도들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정치·사회적으로 펜실베이니아를 지배했다. 이들의 무저항 비폭력 평화주의가 노예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문제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이들보다 훨씬 뒤인 1870년대 일이다.

정전 주장하는 주류에 반대하던 사람들

양심에 의한 거부권은 국가의 시혜를 통해 인정된 권리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인정된 권리도 아니다. 식민지 시기 미국의 일부 주들은 양심에 의한 거부권을 지키기 위해 성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양심에 의한 거부권을 주장하다가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흔히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러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기간중 감옥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대체복무조차 인정하지 않는 ‘전면적 거부자들’(absolutists)이었다.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퀘이커를 비롯한 전통적인 병역거부자들은 미국 독립전쟁 이후 일반적으로 전투임무로부터의 면제를 인정받아왔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7만2354명이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 등록을 했고, 이 가운데 6만6천여명이 비전투 또는 민간 대체복무를 인정받았다. 감옥에 간 6천여명 가운데 다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으며, 이 역시 증인들의 극단적인 입장과 그에 따른 군당국의 편견에 기인한 것이었을 뿐 미국 정부가 대체복무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세례파, 모라비안,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이 모두 다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으나 한기총 목사들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들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로마서 강해’ 등으로 복음주의 지성운동을 이끈 존 스토트 목사와 강원도 태백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보수적인 기독 청년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도자들이다. 존 스토트 목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를 결정하고 감옥에 갈 각오까지 했던 사람이다. 다행히 신학교 입학을 허가받게 되어 감옥행은 피할 수 있었지만(목사안수 후보자의 경우에는 병역에 대한 예외가 인정되었다), 현역 장성이던 아버지와의 갈등은 오랫동안 스토트 목사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대천덕 신부는 독일 잠수함의 공격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대서양 항로 상선의 선원으로 병역의무를 대신했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양심에 의한 거부권을 행사해왔고, 현재 존경받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도 이를 실천한 분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온 입장이 있어왔고, 이러한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은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인 주류의 입장과 함께 기독교 내부의 균형을 이루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병역거부의 주체인 것처럼 오해받아 온 것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다. 병역거부가 여호와의 증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있을 수 있는 입장이라는 상식을 받아들이고 나면 문제해결은 한결 쉬워진다. 대체복무가 이단들을 위한 특혜라는 주장도,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도 모두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단과 기독교의 대립구도는 아니다

양심에 의한 거부권문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다. 이미 서구 여러 나라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거부권 논의를 최소한 반 세기 전에 끝내고 지금은 세속적 양심, 정치적 견해 등에 입각한 거부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처럼 건국 이래 50여년 동안 한번도 전시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나라조차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한다. 오히려 최근 이스라엘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레바논 전쟁 이후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선택적 거부권자”들이다.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전쟁에는 나설 수 있지만, 레바논 전쟁처럼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공격적’ 전쟁에는 나설 수 없다는 군인들이 늘어가는 까닭이다. 인권문제에 대해 전세계가 저 멀리 앞서가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기독교에 발목이 잡혀 이단 시비 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자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장로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대학 시절에는 선교단체 훈련도 받았으며, 사법시험 합격 뒤 남들보다 긴 기간을 군법무관으로 복무했다. 지난달에는 내가 일하고 있는 기독교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해병대 훈련장에서 예비군 훈련도 받았다. 그런 내가 굳이 여호와의 증인의 인권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그들의 이단성을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주보다 귀한 인간”임을 인정한 까닭이었다.

대체복무문제를 더이상 기독교와 이단 사이의 대립 구도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이단과의 싸움을 위해, 평화주의라는 소중한 기독교 유산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단과 우리가 싸워야 할 장소는 법정이나 감옥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 나는 대체복무의 입법화가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김두식/ 변호사·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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