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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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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이 죽인 인권

‘5월 광주’에서 열린 국제 워크숍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 대테러리즘이 몰고 온 아시아 인권 퇴보의 현실과 대안
등록 2011-05-26 02:03 수정 2020-05-02 19:26
» 지난 5월17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 참가한 아시아 각국의 인권 관계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 지난 5월17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에 참가한 아시아 각국의 인권 관계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평화는 목표이자 수단이다.”

빈라덴은 죽었지만 테러와 분쟁은 죽지 않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현대 평화 연구의 창시자 요한 갈퉁의 이 말은 더 새롭게 와닿는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됐지만, 분명 9·11 테러는 세계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기점이었다. 지난 10년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들끓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으로 패권주의의 성난 이빨을 가감 없이 드러냈고, 애국자법(Patriot Act)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열풍은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간단히 제압했다. ‘테러리스트’는 냉전 시기 ‘공산주의자’에 해당하는 ‘으르렁말’(snarl words)이 됐다.

억압과 독재의 빌미가 된 대테러전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은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지난 5월17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는 이 물음에 대한 14개의 대답이었다. 참여연대와 5·18기념재단을 비롯해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아시아 지역의 각국 시민사회단체들로 이뤄진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SDMA·Solidarity for Democratization Movement in Asia)가 주최한 이번 포럼은 ‘5월 광주’에 맞춰 아프간, 파키스탄 등 대테러전의 현장인 나라들을 비롯한 아시아 14개국의 인권 관계자가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포럼아시아의 얍 스웨셍(타이)은 개회사에서 지난 10년 동안 “다수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들은 테러에 맞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억압적 행위와 기존 법들을 정당화할 기회를 잡았다”며 “많은 나라에서 인권과 시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법안이 통과됐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는 또 “용의자를 장기간 구금하고, 그들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정하며, 마음대로 감청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도입할 수 있는 대폭적 권한이 정부에 부여됐다”며 “반체제 인사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구금되고 고문당하며,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집회·표현·결사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일들은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고 알려진 나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이라 불린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인권은 특히 아시아에서 극심한 퇴보를 겪고 있다.” 얍 스웨셍의 말에 한국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둘째 세션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파잘 가니 카카르(아프간 여성전문교육원)는 ‘대테러리즘과 아프간 국민의 도전과제’라는 발표에서 “아시아의 중심에서 피 흘리는 아프간은 모든 지역이 도전과 위험의 상태에 놓여 있다”며 “취약한 정부와 더욱 취약한 정치인을 둔 아프간 사람들은 폭탄 폭발, 자살 공격, 인신 납치로 인해 아침에 집을 나서며 저녁에 다시 집에 돌아온다는 기대를 못하고 있다”고 아프간의 위태로운 현 상황을 전했다. 아프간의 혼란에는 국제평화유지군의 부족도 한 요인이 됐다. “전쟁 이후 아프간에는 많은 중무장 군벌이 존재하고 엄청난 양의 소형 화기가 국민 사이에 유통되고 있음에도, 다른 지역의 분쟁 이후와 비교하면 인구나 영토 대비 가장 적은 비중의 국제평화유지군이 주둔했다.” 무능한 정부와 무력한 평화유지군이 손을 놓은 사이 힘없는 아프간 민중이 테러리즘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무정부적 소요의 근원에는 소련의 침공과 미국의 개입이라는 아프간의 슬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아무런 정부기관도 지도자도 없는 곳에서 테러리즘이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게 됐다”고 정부와 정치인의 무능·무력을 질타했다. 미국의 잘못은 없는 걸까. 그는 말한다. “현재 아프간에는 아프간 국민에 의한 대테러 정책은 없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국들로부터 다양한 정책이 나온다. 이 정책의 수립 과정에서 아프간 국민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안보 문제이며, 아프간 국민이 아닌 이들의 안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가치를 두고 있다.” 아프간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대테러 정책에 정작 아프간 사람들의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테러리즘의 피난처 제공한 대테러리즘

아프간 사람들에 대한 배제는 인구의 99%가 무슬림인 아프간에서 곧 이슬람교도에 대한 배제를 말한다. 파잘 가니 카카르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아프간에 관여해왔음에도 온건한 이슬람 단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종교 내 적대감 고조를 부채질했다”고 비판했다. “이슬람 국가의 관심 사항에 대한 서방세계의 이중적 입장과 종교에 대한 무시가 이들 지역 내 테러리즘의 토대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테러리즘은 아프간 내 국제군의 주둔을 정당화하는 설득력 있는 사유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사람들이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피난처를 제공하는 심리를 촉발했다”고 지적했다.

“아프간 스스로 군대와 경찰을 통해 국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자주적인 아프간 안보군을 강화해 치안을 확보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약 퇴치 노력의 기초는 경제 재건, 특히 지방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매년 7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들은 테러리즘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대안은 국가의 시급한 재건인 셈이다.

빈라덴 사살 이후 추모 열기와 반미 열풍으로 후끈한 파키스탄은 어떠한가. 파키스탄 국가인권위원회 I. A 레만은 ‘테러와의 전쟁과 민주주의: 파키스탄 국가보고서’라는 발표문에서 테러와의 전쟁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억류되고 미국 당국에 인계되며 헌법에 명시된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며 “수천 명의 파키스탄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실종됐다는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수년간 ‘테러리스트’라 지목받은 사람은 누구도 정당하거나 심지어는 공정한 재판조차 받을 수 없었다”며 “2006년에는 정치적 이유로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이 4천 명에 이르렀으나 모든 실종사건에 대해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파키스탄의 인권유린은 오랜 역사를 지닌 각종 악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식민지 시절(1859~1947) 영국은 특별법을 만들어 사법 권한이 없는 당국이 간소한 절차를 통해 강력범죄를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며 “파키스탄은 1860년 제정된 인도형법을 파키스탄형법으로 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왕이나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을 처벌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특히 “1923년 제정된 공직자비밀엄수법과 1952년 제정된 파키스탄 보안법, 1997년 제정된 반테러법 등이 테러리스트 활동에 참가하거나 이를 돕는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억류한다는 명목으로 예방적 구금법의 형식으로 남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파키스탄 시민사회단체는 탈레반이나 그 공범자라는 혐의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구금된 2500명에 대해 구제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공포 분위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며 “파키스탄 정부는 어느 국가도 테러 문제를 다룰 때 법치주의 원칙을 포기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인권·민주주의로 대테러 접근해야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사례 외에도 이번 국제 워크숍에선 아시아 각국 정부가 취한 대테러리즘 관련 법률과 정책, 갈등과 분쟁의 양상, 대테러기관의 권한 남용과 기본권 침해 같은 부작용이 폭넓게 논의됐다. 한국 사회 현실과 관련한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의 마지막 발표 뒤에도 아시아의 활동가들은 대테러리즘의 반인권성에 대한 시민사회 대응과 과제를 두고 진지한 고민을 나눴다. 그 고민의 끝은 “테러리즘의 근원을 다루는 데 인권과 민주주의는 필수적 요소가 돼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광주=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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