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도 세계 10~20위권에 드는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1~2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종합편성채널(종편) 방송 허가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종편 허가를 받은 ‘조·중·동·매’(조선·중앙·동아·매일경제를 묶어 이르는 말) 중 한두 곳은 그렇게 성장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발언이다. 앞으로의 특혜를 예고한다.
#2. “요즘 종편으로 요란합니다. 이 문제는 방송과 언론계 안의 이슈가 아니라 국가적·국민적 난제로 등장했죠. 지상파, 종편, 뉴스채널 열 개 이상으로 소란한 대만과 똑같은 코스로 들어섰습니다. 앞으로 언론의 원칙과 정도를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지난 1월7일 신경민 문화방송 논설위원이 종편 허가 뒤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종편 등장 이후 한국의 방송·미디어 시장에 대한 방송계의 걱정을 담았다. 한국의 미래는 미국·영국 쪽이 아닌 대만 쪽이 더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미국 쪽으로 가면, 거대 미디어 기업이 전체 시장의 90%를 장악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소수의 기업이 중심에 있다. 더 끔찍한 악몽은 대만화다. 100개가 넘는 케이블방송과 9개의 24시간 뉴스채널이 난립해 ‘공멸’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 정치 양극화의 주범, 케이블최진봉 미국 텍사스주립대 교수(저널리즘)에 따르면, 미국의 언론사 소유 집중의 계기가 된 것은 1996년 텔레커뮤니케이션법 개정이다. 미국은 언론사 소유제한을 대폭 풀었다. 제너럴일렉트릭은 〈NBC〉를 사들였다(19개 케이블 방송사, 26개 TV 방송사, 유니버설픽처스 영화사와 잡지사 등을 소유). 디즈니는 〈ABC〉를 차지했다(226개 TV 방송사와 227개 라디오 방송사, 17개 케이블 방송사, 그리고 월트디즈니픽처스를 비롯한 10개 영화 관련 회사를 운영). 타임워너는 〈CNN〉 합병을 시작으로, 16개 케이블 방송사, 12개 지역 TV 방송사, 23개 국제 채널, 워너브러더스 영화사를 포함한 9개 영화 관련 회사를 거느리게 됐다.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은 21세기폭스 영화사와 를 비롯해 27개 TV 방송사, 17개 케이블 방송사, 10여 개 잡지사를 차지했다. 을 포함한 5개 신문사도 포함된다. 이 몇몇 거대한 문어의 흡반을 피한 미국의 미디어는 등 전체의 10%에도 못 미친다.
대만에서도 이를 본떠 1999년 케이블방송법을 개정했다. 골자는 케이블 방송에 대한 자유방임형 정책. 위키피디아(wikipedia.org)를 보면, 대만에는 5개의 공중파 방송사가 6개 채널을, ‘빅7’ 케이블방송사가 100개가 넘는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라디오방송은 200개가 넘는다. 24시간 텔레비전 전문 채널만 봐도 9개다. 방송이 ‘많다’는 문제가 아니다. 방송이 난립하게 된 배경에 있는 ‘정치 논리’가 문제다. 대만 방송은 ‘정치·사회 양극화의 주범’이란 비난을 받고 있다. 거기다 방송의 질적 하락이 더해진다.
“대만과 언론자유에 대한 질문입니다. 대만 천수이볜 정부가 부패 의혹을 취재한 방송의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는데, 미 국무부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2005년 11월1일 미 국무부 기자실, 숀 매코믹 대변인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매코믹 대변인은 “(대만의 케이블뉴스 방송) <tvbs>에 대한 질문이냐”고 되물은 뒤 “대만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은 언론의 자유를 중시해왔기에, (언론의 자유를) 앞으로도 보장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답했다.
같은 해 10월26일 대만의 뉴스채널 〈TVBS〉는 대만의 역사를 바꾼 특종을 한다. 천수이볜 당시 총통의 핵심 측근들이 제주도의 한 호텔 카지노에서 바카라를 하고 있는 장면을 공개한 것이다. 밤 9시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 의 특종이었다. 도박의 주인공은 대만 총통부 전 부비서장 천저난과 고속철도 사업 고문 천민셴이었다. 대만 야당들은 당시 “천 총통의 측근들이 고속철도 사업 과정에서 부정 축재한 자금을 제주도 카지노에서 돈세탁해왔다”고 주장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공개된 것이었다.
저항적 방송으로 시작했지만
천수이볜 정부에는 직격탄이었다. 민진당 정권에 대한 국민당 지지자들의 항의와 시위가 이어졌다. 대만 검찰은 두 천씨를 불러 조사에 들어갔다. 천수이볜 총통의 광범위한 부정 축재가 뒤이어 밝혀졌다.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천수이볜 정부는 사건 초기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언론정책과 국가 홍보를 담당하는 신문국 야오원즈 국장은 “〈TVBS〉가 홍콩과 대만 합작회사지만 실질적 주체는 홍콩인 것으로 보인다”며 “법률에 근거해 방송사 허가를 취소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태도는 미 국무부 브리핑장에서 거론될 만큼 국제적 이슈가 됐고, 천 정부는 방침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 정부가 방송 허가 문제를 무기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대만의 골 깊은 정치 갈등과 그에 얽힌 방송과의 관계 때문이다.
대만 정치 대립의 배경엔 지역 갈등이 있다. 국민당을 따라 중국에서 넘어온 중국 출신 외성인(外省人) 15%와 대만 원주민 출신 본성인(本省人) 85%의 갈등이다. 외성인들이 주로 북쪽에 살고 있어 지역 갈등 형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대만에서는 지역 갈등이 아닌 ‘성적(省籍) 갈등’이란 표현을 쓴다).
정치·경제·사회의 실권을 모두 쥔 외성인들은 1960년대부터 지상파를 설립해 정부와 여당(국민당)에 유리한 뉴스를 주로 방송했다. 야당이 이에 맞서 케이블방송을 택했다. 대만 케이블방송의 시작은 음성적이었다. 대만은 지형적으로 산이 많아서 공중파가 수신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공동안테나를 설치하고, 이를 중계해주는 유선방송이 생겼다. 유선방송 중에는 자체 제작한 뉴스를 방송하는 곳도 있었다. 국민당 편향적인 공중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본성인들은 케이블방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야당 관계자들이 본격적으로 케이블방송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만에서는 이를 ‘제4방송’이라고 불렀다. 1979년 대만 정부는 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들불처럼 번져가는 케이블방송을 막을 길이 없었다. 대만 정부는 1993년 케이블TV법을 만들어 합법화했다. 대만 케이블방송의 시작은 ‘저항적’이었다.
뉴스에서 오락으로, 달콤한 상업화
국민당 정부는 케이블방송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1999년 ‘케이블방송과 텔레비전법’???을 내놓았다. 이 법안은 케이블방송과 전화사업자의 교차 소유를 허용하는 등 소유구조를 자유방임으로 하는 것을 핵심으로 했다. 목적은 케이블 사업자들의 관심을 ‘뉴스’에서 ‘오락 프로그램’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케이블 방송사들에 부과하던 ‘자국산 프로그램 20% 의무 상영’ 조건을 없앤 것이다. 케이블방송 사업자들은 이때부터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유럽의 방송 프로그램들을 사들이는 데 몰두했고, 비교적 손쉽게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다. 대만의 ‘빅7’ 케이블 방송사들의 2010년 시청점유율은 약 78%에 이른다. 공중파는 14% 정도에 그친다.
입에 달면 몸에 해로운 법이다. SBS 정책팀의 엄재용 차장은 “대만의 경우 자유방임형 케이블TV 정책으로 종합편성화한 케이블방송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외국산 프로그램을 앞다퉈 수입해 방영한 결과, 대만 내의 제작 기반이 붕괴한 것은 물론 문화주권까지 위협받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만은 제3세계 국가로는 보기 힘든 자국산 프로그램 수급률을 기록했다. 방송학계에서는 대만을 유일하게 미국산 프로그램의 공세에서 벗어난 국가의 예로 들 정도였다. 반전에 걸리는 시간은 10년이 채 안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비를 각국별로 따져보면 쉽게 확인된다. 2005년을 기준으로 일본은 205억5510만달러, 한국은 8억6646만달러인데, 대만은 2708만달러에 불과했다. 자국산 방송 프로그램 비율도 한국과 일본이 63.3%와 77.5%인 데 비해 대만은 40%에 그쳤다.
방송가에서는 ‘한류’의 위기를 걱정할 법하다. 엄재용 차장은 “현행 방송법에서 지상파는 60~80%의 국내 제작 프로그램 의무편성 비율을 적용받지만, 비지상파는 20~50%에 그친다”며 “종편사업자들은 핵심 시간대에는 제작비를 많이 들이는 국내 제작물을 편성하고, 주변 시간대는 저가의 해외물을 수입해 편성하는 전략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가 의 종편에, 이 의 종편에 주주로 참여한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양문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지난해 9월 과의 인터뷰에서 “종편 사업 추진을 위해 일본 오락 프로그램의 금지를 풀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탐지되고 있다”며 “자체 콘텐츠를 제작하기보단 일본 오락 프로그램을 싸게 들여와 이익을 챙기려는 사업자들의 아이디어가 정부 쪽에 전달되는 것 같고, 정부 쪽에서도 압박을 받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양수쥔 사태의 배후에도
이런 우려도 뉴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만은 지역 갈등과 맞물린 국민·민진당 양당 체제의 영향으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다. 국민당에 편향된 공중파 뉴스에 대한 불신이 겹쳐 각 케이블 방송사들은 9개의 24시간 뉴스채널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 많은 방송사가 방송 시간을 모두 채울 뉴스가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대만 뉴스가 얻게 된 것은 선정성, 파파라치성, 가십성 보도의 악명이었다. 지난해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25)의 실격 처리 사건을 ‘혐한’으로 몰고 간 대만 방송의 보도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다. 2010년 11월22일치 기사는 그 본질을 이렇게 파헤쳤다.
“중국에 대한 독립 노선을 내세우고 있는 대만의 제1야당인 민진당은 이번 사건을 27일로 다가온 타이베이 등 5개 도시 지방선거의 호재로 활용하고 있다. 민진당의 입법위원(국회의원) 차이황량은 ‘이번 사건의 배경에는 자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안기려는 중국의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음모론은 실격의 원인이 된 발뒤꿈치 센서가 아시아태권도연맹의 중국인 부총재 자오레이에 의해 처음 지적됐고, 양수쥔이 실격 처리된 뒤 자오의 제자인 중국 선수 우징위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방송 뉴스를 활용하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짜이요’(加油·중국어로 ‘파이팅’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기름을 붓는다는 뜻으로 썼다)다.
뉴스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이 토론 프로그램이다. 대만에서는 뉴스전문 채널들이 앞다퉈 정치 토크쇼와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국민의 정치 성향이 뚜렷이 갈린 상황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출연자들의 자극적인 말에 시청자가 쉽게 환호한 탓이다. 출연자를 고정할 경우 60분 방송을 제작하는 데 한국 돈으로 1천만원도 채 들지 않는 ‘경제성’도 한몫했다.
대만 영자신문 의 양수메이 기자는 “대만 정치에 미치는 뉴스, 특히 토크쇼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이 토크쇼들은 유권자를 국민당과 민진당 양쪽으로 갈라놓는 원인으로 비판받고 있다”고 밝혔다.
9개 채널의 뉴스는 무엇으로 채울까
대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토크쇼 진행자는 〈TVBS〉의 을 진행하던 리타오 보도국장이었다. 천수이볜 전 총통의 측근 비리를 터트린 그는, 민진당을 향한 독설로 국민당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를 낙마시킨 것은 결과적으로 민진당이었다. 2007년 4월 〈TVBS〉가 조직폭력배 관련 뉴스를 조작해 방송한 것이 드러나자, 민진당 당직자와 지지자들은 방송사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사흘 뒤 그는 사표를 냈다.
한국에서는 올해 말 현재의 YTN과 MBN에 보도전문 채널 연합방송이 가세해 3개의 24시간 뉴스방송이 생긴다. 기존 공중파 3사의 뉴스와 종편 3사의 뉴스가 더해지면 모두 9개의 아침·점심·저녁·밤 뉴스가 방송된다. 한국의 정치 상황도 대만만큼 극단적인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분단된 상황도 같다. 늘어난 방송사들이 통합에 기여할까, 분열에 기여할까. 대만에서 찾은 답은 ‘핵분열의 가속화’다.
이태희 기자 한겨레 경제부문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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