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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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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마녀의 조울증

아마존 밀림의 정원에서 아나키스트 베네와 함께했던

상상력 가득한 예술과 음식의 세계
등록 2010-10-20 10:2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인터넷이 뜨거워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열렬히 환호하거나, 격렬하게 분노하거나. 김연아·박지성·박칼린같이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영웅들에 환호하든가, 정선희·타블로처럼 근거 없는 억측과 반이성적인 집단 광기가 규정하는 마녀들에 비수를 꽂으며, 밋밋한 인터넷을 견디지 못하는 이 사회는 급격한 집단적 조울증을 앓고 있다.

인터넷을 달구는 쌍생아

영웅 만들기. 그것은 비루한 건국 신화를 도색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마취제였고, 할리우드를 통해 전파돼온 오랜 미국적 습관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비밀을 밝혀내고, 어려움을 홀로 극복해낸다. 현실의 삶이 초라할수록, 구차한 오늘을 견디게 해줄 영웅이 필요하다. 그들을 태양처럼 바라보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료하고 구차한 자신의 일상을 견딘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반드시 마녀도 필요로 한다. 영웅을 떠받드느라 초라해진 자아를 북돋아주는 반대급부다. 영웅과 마녀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구성한다. 마녀를 함께 사냥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의감과 연대감이 고취된다. 그들은 마녀를 처단하는 것으로, 자신의 초라한 일상에서 구원받는다.

얼마 전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에서 한류를 주제로 한 대담이 방송되었다. 프랑스와 한국의 전문가들이 초대돼 한류의 성공 비결을 논했는데, 한국 드라마의 폭발적인 성공의 핵심 배경은 결과적으로 온 국민이 그토록 열렬하게 드라마를 즐기는 한국적 특수성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심히 공감한다. 드라마 작가의 손끝에서 생산된 가상의 인생에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웃으며 국민 여동생, 국민 친정 언니를 생산해내는 가운데 한류의 탄탄한 토대는 닦인 것이다. 그 대가는 참혹하다. 가상과 현실 세계의 경계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게 모두의 현상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참한 예진 아씨를 연기했던 황수정에게는 똑같은 행실이 현실에서 요구되고, 그녀가 나눈 사랑, 복용했던 최음제 따위가 국민적 분노를 사 마땅한 현상이 벌어진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남편을 ‘잡아먹은’ 정선희에 대해서는 온 국민이 매서운 시댁 식구의 눈초리가 되어 그녀를 나무란다.

‘타진요’를 이끌던 57살의 남자. 그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에 열광하며 수개월간 몰아의 경지에서 마녀사냥에 몰입한 15만 명, 혹은 그 이상의 군중도 이러한 현상의 아찔한 사례다. 그들은 마치 웹상에서 흔히 즐기던 컴퓨터게임을 현실에서 직접 즐겨보기라도 한 듯, 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열심히 싸웠다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자축한다. 그동안, 즐거웠다. 고생했다….

후퇴한 자아의 회복

주말 내내 방구석에 몸을 고정시키고 드라마에서 드라마로 점프하며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생들에 몰입하다가 텔레비전을 껐을 때, 허공에 발을 딛는 듯한 불안이, 내장이 송두리째 비워진 듯한 당혹감이 순간 밀려오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는지. 그것은 내 삶으로부터 자아가 점점 후퇴해갈 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불쾌감이다. 그 순간을 여전히 불쾌하게 느낄 감각이 남아 있다면, 희미해져가는 자아를 회복할 희망이 있다. 영웅과 마녀라는 미디어와 대중이 생산해내는 이 비루한 시대의 집단적 마약을 끊고, 내 삶을 움켜잡을, 그리하여 내가 비로소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될 희망이.

목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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