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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마음을 살펴 큰 공사를 중단하다



섬 생활 알고자 뱃길로 부임한 지도군수 오횡묵… 담배·바늘·엽전 들고 농민들 만나
등록 2010-05-07 04:44 수정 2020-05-02 19:26

자산은 중국 정나라의 재상이었는데, 하루는 물가를 지나다 백성이 물을 건너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산은 기꺼이 그가 타고 가던 수레로 백성을 일일이 건네준 뒤에야 그 자리를 떠났다. 언뜻 보면 자산의 행동은 자애롭기 그지없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바쁜 길을 가다 멈추고 자신의 수레를 빌려주었으니 겸손하고 좋은 인품을 가졌다 할 수도 있겠다.

7일간 벼룩에 시달리며 배를 타고…

선정을 펼친 수령이 퇴임하고 돌아가면 백성이 그를 기리며 선정비를 세우곤 했다. 오횡묵을 기리는 선정비. 이선희 제공

선정을 펼친 수령이 퇴임하고 돌아가면 백성이 그를 기리며 선정비를 세우곤 했다. 오횡묵을 기리는 선정비. 이선희 제공

하지만 자산의 일을 두고 맹자가 말하기를, “자산은 은혜스럽기는 하지만 정치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한낱 칼도 크기에 따라 용도가 나뉜다.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필부가 하는 작은 은혜를 폈다고 하여 어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맹자는 재상이라면 백성이 물을 건너는 근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리를 만드는 것이 진정 어질다고 할 수 있다고 신랄히 비판한 것이다. 재상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몇 사람을 기쁘게 했다고 자족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재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을 책임진다는 뜻은 작은 온정을 베푸는 게 아니라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올바른 정치가 대사(大事)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굽은 것을 바르게 하려다 더 굽게 한다고 했다. 작은 온정은 제쳐두고 큰일만을 도모하는 것으로 정치를 오해한다면 폭정에 빠지기 쉽다. 제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폭정에 빠지지 않는 기준은 언제나 백성의 뜻이다.

오횡묵이 섬마을 최초의 목민관인 지도군(지금의 전남 신안군) 군수에 임명된 것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 때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고종을 알현하고 나온 오횡묵은 지도섬까지 육로가 아닌 뱃길로 부임할 것을 결정했다.

“내 평생 일찍이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보지 않았고 또 지금이 비가 내리는 철이라 사람들은 뱃길을 더욱 피하라고 한다. 하지만 섬에서 섬을 다스리라는 임금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야 한다. 우선 백성이 살아가는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저 섬사람들이 물길을 왕래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과연 어떠한가를 내가 몸소 시험해보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뱃길로 가겠다 하는 본의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평생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7일 동안이나 걸려 부임지에 도착했다. 출발하고 첫날 밤을 지내며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천둥·번개를 치며 내리는 비에 배 안은 습하기 이를 데 없었고 벼룩이 그를 괴롭혔다. 그나마 배 안에서 기르는 닭이 새벽과 저녁에 울어 때를 구별하게 해주었다. 간혹 몸이 너무 지칠 때면 전별 선물로 받은 소주 한 항아리를 기울여 한잔씩 마시며 노곤함을 눌렀다.

고종이 지도군을 신설하기 전까지 섬은 가까운 육지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소속처가 먼 탓에 섬사람들의 고역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머무를 동헌조차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헌은 처마 추녀와 서까래가 모두 썩어 떨어지고 뚫어진 창 담벼락에는 물이 스며들어 진흙을 이겨놓은 듯했다. 방 가운데에서는 개구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동헌 앞뜰은 풀이 무성했다. 오횡묵은 하는 수 없이 아전의 관청을 임시 거처로 삼아야 했다.

이런 곳에 처음으로 부임한 군수인 오횡묵은 섬사람들을 위무하며 제대로 된 행정구역으로 모양새를 갖춰야 했다. 그에게 섬생활은 육지와 다른 풍속을 지닌 섬사람들을 통치하고 국가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섬 지역을 장악한 토착 토호 세력과 맞서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섬사람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생애 처음으로 배를 탔던 그 정성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책임자가 스스로 술책에 빠지는 경우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아랫사람에게 응대해 물 흐르듯 막힘없이 할 때이다. 새로 부임한 목민관이 모든 사정에 밝을 수는 없다. 한 가지 명령이라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으뜸 아전과 해당 담당자에게 일의 근본을 캐보고 따져봐서 밑바닥까지 궁구해 스스로 마음이 환해진 뒤에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더딘 것이 갑갑하겠고 일에 차질이 생기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에 밝아져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일을 멈추는 것 또한 백성을 위하는 길”

옛 아전들의 농담 같은 말이 있다. 수령이 새로 부임해서 일마다 까다롭고 일의 근본을 캐묻는 경우, 나이 든 아전들이 서로 말하기를 “조짐이 고달플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일 처리가 물 흐르듯 쉽게 넘어가는 수령에게는 아전들이 서로 웃으면서 “징조를 알 만하다”고 하며 좋아했다는 것이다.

목민관이라면 말 한 필에 시동 한둘을 데리고 순행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대개 진실하고 솔직한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행하는 본래 목적을 잊어서도 안 된다. 그저 백성을 만나 위로하는 것이 순행의 목적이 아니다. 목민관이라면 그저 백성을 만났다는 것으로 자랑 삼을 일이 아닌 까닭이다. 오횡묵은 순행을 자주 했는데 그 모습이 다소 남달랐다. 백성을 위한 그의 정치는 지도군수에 앞서 강원도 정선군수 시절부터 특이했다. 정선에 재임하던 시절 오횡묵은 농사를 독려하기 위해 순행을 나설 때면 잎담배와 바늘, 약간의 돈을 챙겨 나갔다. 순행길에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농민을 보면 잎담배 두서너 모숨과 바늘 네다섯 개씩을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에게는 서 푼 혹은 너 푼씩을 줘 힘든 시절 힘을 돋우려 했다. 농사일이 한창인 5월이면 오횡묵은 항상 이렇게 담배·바늘·엽전을 들고 논과 밭의 농민들을 만났다. 지도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횡묵은 지도군에서 해결해야 할 일 중에 방죽을 고쳐 쌓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게 됐다. 오횡묵은 버려진 방죽에 직접 가서 살핀 뒤 이곳을 개축하면 30여 섬의 소출을 얻을 땅을 마련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오횡묵은 백성이 농사를 짓게 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백성의 생각은 달랐다. 많은 사람이 모여 오횡묵에게 말하기를, “저희는 본디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왔습니다. 이제 이렇게 큰 공사를 시작하시면 소금 굽는 일에 지장이 너무 큽니다”라고 했다. 오횡묵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백성은 당장 눈앞의 손익만을 따져 간척사업을 반대하지만 멀리 보면 농토를 만드는 일이 그들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횡묵은 더 이상 자신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는 것 또한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내 어찌 한 가지만 고집하겠는가.” 오횡묵은 즉시 방죽 쌓는 계획을 정지시켰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일을 그만두는 것이 더없이 애석하기 그지없었지만 백성의 마음을 좇아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중용의 기준점은 백성

오횡묵이 지도군수로서 바쁜 일정을 지내던 중 여수군수로 새로 부임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소식을 들은 백성은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해달라고 밤새워 광주부와 서울부로 달려가 그들의 마음을 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횡묵이 새로운 부임지로 떠날 때면 그곳 백성이 계속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올렸다. 경남 함안에서는 백성의 뜻이 받아들여져 결국 4년간이나 함안군수로 재직했다. 선정을 베풀던 목민관을 보내야 하는 백성은 뒤이어 올 후임자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 더욱 애달프게 오횡묵을 떠나보내야 했다.

올바른 정치란 어떤 상황에도 적용되는 정형화된 답을 갖지 않는다. 올바르다는 건 중용을 지키는 것인데, 중용이란 매번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끈의 중간점과 비슷하다. 한 번 정한 중간점이란 없으며, 상황과 줄의 길이에 따라 중간점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다. 직위에 맞는 바른 일에는 중용의 덕이 더없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용의 기준점은 바로 백성인 것이다.

이선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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