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문화재를 둘러보는데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색의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물어보니 돌아가신 육영수씨가 좋아하던 색이어서 당시 공공기관에서 지은 건물들은 미색 일색이었다는 다소 믿지 못할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공무원도 보는 눈이 있을진대. 나는 본인의 예술적 감각을 뒤로한 채 공직을 유지해야 했던 이름 모를 공무원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그 뒤로 이처럼 관에서 주도한 흔적이 역력한, 즉 색채 감각이 안이하고 조화의 개념이 희미하며 밝고 희망찬 메시지가 필히 끼어 있는, 유독 시멘트 냄새 강렬한 공간을 칭하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름 하여 ‘공무원 아트’. 관에서 지은 시설물이 자아내는 특유의 미적 감각을 볼 때마다 ‘음, 역시 공무원 아트에는 파스텔색이 제격이야’ 하며 나름 즐기기도 했다.
공공기관 건물에 미색이 많은 이유
공무원 아트
그러나 이런 조소도 이제 과거가 됐다. 거리의 승차장이나 휴지통 등도 도시디자인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는 현실이라 눈을 즐겁게 해주는 공공 시설물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공무원 아트’의 은근한 팬으로서 나는 최신의 진보한 ‘공무원 아트’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갔다. 이곳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으나, 에펠탑도 건설 당시에는 모파상 등 당대 예술가들로부터 바벨탑에 비유되는 유명한 항의문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광화문에는 에펠탑 같은 파격의 조형물 대신 ‘공무원 아트’의 주 레퍼토리인 세종대왕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일 오후, 성군의 업적을 기린 지하 전시실에는 어르신들이 단체로 구경하고 있었고 플라워카펫에는 사진을 찍는 나들이객들이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그야말로 ‘구경거리’를 찾아온 이들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까마득한 후배 격인 해치 상을 보며 이곳이 구경거리의 역할이라도 충실히 해낸다면 다행이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피라미드건 바티칸이건 베르사유건 후세를 먹여살리는 ‘구경거리’들은 당대 권력과 자본의 과감한 과시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진부하고 심심한 풍경이었다. 거기에는 아직 명소의 중요 조건인 ‘이야기’가 없었다. 한 공간이 명소가 되려면 빼어난 풍광뿐 아니라 사람들의 만남과 소통, 기억이 있어야 한다는데, 지하 벙커처럼 웅장한 전시실 ‘세종 이야기’는 훌륭했으나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지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광화문의 시야를 확보했다는 것은 확실히 개안과도 같은 경험이었으나 역시 급작스러웠다. 이 광장을 장식할 것은 피어야 열흘이라는 꽃이 아니라 앞으로 이곳을 기억할 개개인의 모든 이야기였다. 과연 어떤 변화와 역사가 또 이 광장을 지날지 생각하며 서대문으로 걷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흥미로운 전시회를 발견했다.
‘세 이방인의 서울 회상’은 1919년 앨버트 테일러, 1947년 미군 병사 프레드 다익스, 1973년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이 세 사람이 서울에서 머물며 찍은 사진들의 전시회였다. 고종의 국장에서 청계천의 판자촌까지 이곳을 사랑한 외국인의 눈으로 본 옛 서울의 모습에서 나는 묘한 안도감과 서글픔을 느꼈다. 서울의 역사를 삶의 중요한 기억으로 삼으려 한 그들의 정성은 새삼 도시 공간이란 결국 개인의 공간임을 일깨웠다. 단순히 구경거리를 보러 온 이방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적극적으로 그 풍경의 일원이 되어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영원히 사라진 중앙청의 흑백 사진을 가슴에 담고서 다시 광화문으로 나왔을 때 나는 이 도시에 살짝 부탁을 하고 싶어졌다. 여전히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원래 미인이었다는 사실을 잊고서 더욱 예뻐지려 애쓰는, 피부 트러블의 원인을 무시한 채 색조 화장에 공을 들이는 이 아름다운 서울에. 우리, 함께 아름다워지자고. 결국 너도 너의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삶을 닮을 터이니.
이지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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