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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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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다

1930년 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 농성에 경찰이 중재 나서…
용산·쌍용차 사태 방관하는 현 정부와 대조적
등록 2009-08-05 16:40 수정 2020-05-03 04:25

사례 1: 1930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고무공업도 불경기에 빠지자 조선의 고무신 업계는 평균 20% 임금 인하와 인원 감축에 들어갔다. 이에 평양 지역의 10여 개 고무신 공장 노동자 1800여 명은 8월8일부터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8월23일에는 1천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인 끝에 그중 200여 명이 4개소 공장을 점거해 신규로 채용되어 작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곧바로 무장경찰이 출동했지만 노동자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경찰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장 습격과 점거는 이후 일주일간 계속되어 연인원 5천여 명이 16번이나 공장을 습격, 점거했다.

평택은 여전히 전쟁터다. 겨우 노사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타결될지는 미지수다. 쌍용자동차 직원들과 용역들이 지난 7월28일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농성 중인 노조원들이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평택은 여전히 전쟁터다. 겨우 노사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타결될지는 미지수다. 쌍용자동차 직원들과 용역들이 지난 7월28일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농성 중인 노조원들이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삼엄한 일제강점기임에도 경찰은 탄압과 동시에 조정자를 자처했다. 신간회 평양지부장 조만식이 대책위원장으로 나선 가운데 중재에 나선 평양경찰서장은 노사 당사자들을 경찰서로 불러 평안남도 경찰부장 등의 입회 아래 협상 타결을 종용했다. 양쪽은 임금 10% 인하 등의 조건에 합의했다. 하지만 일반 노동자들의 거센 항의로 협상안은 거부되었고 투쟁이 계속되어 63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경찰 사망자까지 나왔지만 일부 처우개선 합의

사례 2: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80년 4월21일, 강원도 사북읍의 동원탄좌 노동자 3천여 명이 전면적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광산노련에서 43%가량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노조가 20%에 타결해버리자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며 폭발한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계엄령이 발효되던 삼엄한 시절이었다. 경찰은 점거농성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포탄 2발과 최루탄 3발을 쏘며 공격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즉각 투석으로 맞섰다. 부녀자들까지 포함된 3시간여의 공방전으로 경찰은 30명의 부상자를 낸 채 퇴각했고 그중 한 명은 사망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사북읍내 사방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경찰의 출입을 막고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을 파괴해버렸다.

사건의 확산을 우려한 군사정권은 강원도지사를 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해 직접 협상을 주도하도록 했다. 노동자들은 점거농성 4일 만에 상여금 250%를 400%로 인상하는 등의 사항에 합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이 사건으로 31명이 구속되었으나, 몇몇 주동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집행유예나 형 집행 면제 조치로 석방되었다.

사례 3: 다시 27년이 지난 2007년 6월30일, 이랜드그룹 노동자 600여 명이 대형 유통업체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랜드는 기독교 정신을 구현한다는 명분 아래 판매직 노동자를 최저임금을 겨우 웃도는 80여만원 급여로 혹사시키면서 노조를 불온시해 교섭조차 거부해온 악명 높은 기업이었다.

이랜드가 점거농성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거부하자 노무현 정부는 이상수 노동부 장관을 통해 노사 양쪽 대표를 노동부로 불러 중재했다. 그 자리에는 교섭이 시작된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홈에버와 뉴코아 사장이 노동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부의 중재에도 이랜드 쪽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면했고, 정부 역시 점거농성 한 달 만에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파업과 잇단 점거농성은 이후 1년6개월이나 계속되었고, 매출 감소를 견디지 못한 이랜드그룹은 끝내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매각하는 큰 손실을 입어야 했다.

사례 4: 2009년 5월22일 경기도 평택의 쌍용자동차 노동자 600여 명이 집단해고를 거부하며 본사 공장을 점거했다. 정리해고를 강행하려는 회사 쪽과 해고 노동자들의 대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7월31일 현재까지 70일 넘게 점거가 계속되는 동안, 노동자와 가족 4명이 과로나 자살 등으로 숨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문제이므로 개입하지 않되, 불법 폭력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워 외면과 탄압으로 일관했다. 대통령은 물론이요 어떤 고위 관리도 개입을 거부한 가운데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 진압을 시도하고 있다.

경찰은 전기와 식량은 물론, 물과 가스 공급까지 끊어 노동자들은 두 개의 드럼통을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물이 없어 에어컨에서 나온 물을 끓여먹고 있다. 스티로폼을 녹이는 최루액에 피부와 얼굴이 타들어간 부상자가 나날이 늘어가지만 어떤 치료 수단도 없고 의료진의 접근조차 차단되었다.


농성은 약자의 선택

오랜 노동사에 보듯, 농성이란 약자들이 선택하는 저항 수단이다. 대단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공장 점거 또한 그렇게 되풀이돼왔다. 상대를 압도하는 공격력을 가진 세력이 스스로 성 안에 숨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농성자들의 무력이란 자신을 지키는 자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쌍용차 사태가 벌어지자 보수 세력들은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만 챙긴다고 비난한다. 볼트 새총이니 화염병 같은 살인적인 폭력으로 국가 기강을 흔들고 있다고 열분을 토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폭력은 생존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과 경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수단일 뿐, 선제공격의 수단은 아니다. 그래서 쌍용차 공장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을 위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회사를 위한 법률 집행을 내세우는 이명박 정권이다.

식민지·독재 시절보다 사회 안정에 무관심

독재정권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정부들은 물론이요, 일제 총독부조차도 대규모 쟁의가 일어나면 곧바로 개입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정치의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와 쌍용차 점거사태에 대한 일체의 중재 거부와 일방적인 탄압을 보면 이명박 정권의 정치철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밀짚모자에 막걸리 마시며 농민들을 농촌에서 내쫓았던 박정희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에서 떡볶이 사먹으며 대형 유통을 양산하고, 평등교육 내세우며 귀족학교 양성하고, 4대강을 보호한다며 대운하로 파괴하고, 남북 평화를 말하며 남북 긴장을 고조시키는 식의 이중 정책의 달인이다.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노사 협상이 겨우 시작되어 7월31일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 노사 문제는 끝까지 “노사 자율에 맡긴다”는 원칙을 지키려는 듯 보인다. 그러곤 버젓이 대규모 경찰병력을 대기시켜놓았다. 게다가 무장경찰의 공격 목표는 오직 파업 노동자들을 겨눈다. 신자유주의라는 명분 아래 공식적인 책임을 회피하면서, 실제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더 이상 억지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배후에서 강자를 지원하지 말고, 쌍용자동차의 회생과 노사 합의를 위해 당당히 나서야 할 것이다.

안재성 노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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