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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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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덩어리’ 드라마 외주제작

방송사들, 원가 60~70% 수준에 외주업체에 맡겨 간접광고 조장…
적자 다반사에 출연료 체불액 63억원 육박
등록 2009-07-14 07:57 수정 2020-05-02 19:25

지난 7월3일, 중견배우 ㄱ씨가 서울 여의도의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한예조) 사무실을 찾았다. 브라운관을 통해 그동안 보여왔던 밝고 건강한 모습은 간데없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는 지난 4월 종영된 문화방송 수·목 드라마 의 출연료 8천여만원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생활고를 호소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이 드라마에만 매달렸다.

지난해 10월 한국방송 월·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제작발표회 모습(왼쪽). 이 드라마 출연자들은 10억원의 출연료를 지급받지 못했다. 출연료 미지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김응석 위원장. 사진 왼쪽부터 한국방송 제공·<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지난해 10월 한국방송 월·화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제작발표회 모습(왼쪽). 이 드라마 출연자들은 10억원의 출연료를 지급받지 못했다. 출연료 미지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의 김응석 위원장. 사진 왼쪽부터 한국방송 제공·<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스타급 많은 미니시리즈가 대표적

지난 1년간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방영된 드라마들의 미지급 출연료 총액이 60억원을 넘어섰다. 한국방송이 등 4개 드라마에서 12억6천만원, 문화방송이 등 5개 드라마에서 40억3천만원, SBS가 등 3개 드라마에서 9억1천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총 12개 드라마 62억700여만원이다. 모두 외주제작사가 만든 드라마들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 입수한 한예조의 ‘방송사 출연료 미지급 현황’(7월3일 기준) 자료를 통해 확인됐다.(표 참조)

현재로선 ㄱ씨가 출연료를 지급받을 확률은 희박하다. 의 경우 외주제작사인 지피워크샵의 자금 상황이 좋지 않아 언제쯤 출연료를 지급할지 알 수 없다. ㄱ씨를 포함해 의 출연료 미지급액은 총 6억9천3만862원이다. ㄱ씨의 매니저는 “현재 지피워크샵의 상황 자체가 힘들다고 한다”며 “개인적으로 노력해봤자 돈 받을 길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방송사 출연료 미지급 현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방송사 출연료 미지급 현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외주제작의 세계엔 모순이 가득하다. ‘비싼’ 드라마일수록 ‘싼’ 외주제작사에 맡겨진다. 스타급 출연자가 많아 편당 제작비가 많이 드는 미니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국방송의 한 드라마 PD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스타급 연예인을 캐스팅해야 하니 돈이 많이 들어 외주제작으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자체제작을 할 경우 편당 제작료가 1억5천원 이상 든다면 외주제작으로 돌려 편당 1억원 정도만 주는 식이다. 김응석 한예조 위원장은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주는 돈은 전체 제작비의 60~70%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외주제작사는 1회 촬영부터 삐거덕댄다. 지난해 하반기에 방영된 한국방송의 외주제작 월·화 드라마 과 후속인 은 모두 1회분 출연료부터 미지급된 상태다. 한국방송에서 최근 1년간 방영한 월·화 드라마 가운데 출연료를 전부 지급한 드라마는 한 편뿐이다. 이렇게 ‘화려한’ 미니시리즈에 ‘비루한’ 출연료 미지급 문제가 몰려 있다. 한예조 자료를 보면, 출연료를 미지급한 12개 드라마 중 11개가 월·화, 수·목 미니시리즈다. 지난해 11월 이 보도했던 미니시리즈 의 출연료 미지급 문제(734호 인권 OTL ‘도 돈을 못받았다고?’)도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간접광고 안 되면 외주업체만 ‘적자’
2008년 연예인 연간 수입

2008년 연예인 연간 수입

외주제작사의 부족한 자금을 메워주는 건 ‘간접광고’다. 외주제작사는 ‘간접광고’를 두고 방송사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다. 방송사는 “제작비는 간접광고를 통해 구하라”고 하고 방송통신심의위는 “왜 간접광고를 그렇게 많이 하냐”고 호통친다. 하지만 간접광고를 유치하지 않으면 드라마 제작은 무조건 적자다. 드라마 앞뒤로 붙는 광고는 방송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외주제작사들은 간접광고를 할 기업 찾기에 혈안이 된다. 하지만 광고주들은 갈수록 시큰둥하다. 한 외주제작사 대표는 “지난 1~2년 사이에 간접광고 단가가 절반 이하로 추락했고 광고주 기업의 규모도 작아졌다”고 말했다. “노골적으로 제품 홍보를 할 수 없으니 광고주들도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방송사 쪽에서 보면 ‘적은 돈’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기에 외주제작 비율은 높아만 간다. 지난해 10월, 한국방송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한국방송의 외주제작 비율은 1TV 25.1%, 2TV 46.2%였다. 10년 전인 1998년의 1TV 6.5%, 2TV 25.8%에서 급증한 수치다.

외주제작 비율은 높아지지만, 방송사들은 외주제작사 선정과 관리·감독에 소홀하다. 한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 제작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에도 방송사가 제작을 맡긴다”며 “전문 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배우나 스태프들은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되고, 결국 출연료 미지급과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제작비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출연진이나 스태프들이 임금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는 방송사의 관심 밖이라는 것이다.

실제 드라마 제작은 방송사에서 파견 나온 프로듀서들이 맡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현재 방영 중인 한 외주제작 드라마의 경우 방송사에서 PD 4명을 파견해 제작하고 있다. 유명한 프리랜서 PD가 나서지 않는 경우에는 대부분이 파견 PD의 지휘를 받는다. 외주제작사가 돈을 구하지 못해 출연료를 미지급해도 파견 나온 PD들은 아무 관계 없이 방송사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제작 지휘는 파견 나온 방송국 PD들이

이런 환경에서 연예인들의 임금 구조는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예조 조합원 중 탤런트·성우·희극인·연극인·무술연기자 3565명의 2008년 수입을 조사한 결과, 68%에 달하는 2415명이 한 해 동안 1천만원 이하를 번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2182명(67%)에서 233명이 늘어난 수치다. 1억원이 넘는 ‘큰돈’을 버는 스타는 전체의 7%(263명)에 불과했다.

지난 7월6일 국회에서 열린 ‘연예산업 취약적 구조와 인권’ 세미나에서 한국방송 탤런트 실장인 배우 박칠용씨는 “많은 동료들이 돈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살고 있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한예조는 올해 방송 3사와 단체협약의 주요 요구안으로 ‘출연료 미지급·지연지급 해소를 위한 안전장치 마련’을 제시했다. 하지만 방송사 쪽은 ‘외주제작사와 해결할 문제’라는 태도다. 한예조는 “방송사·외주제작사와 진행 중인 출연료 미지급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면 외주제작 드라마에 집단적으로 출연을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류 열풍까지 몰고 온 ‘드라마 제국’의 뒷면은 노동자들의 눈물로 얼룩져가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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