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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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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는 폴라니와 함께

753호 표지이야기로 다룬 경제학자의 대표 저작 <거대한 전환> 출간,
한겨레문화센터 등 강좌도
등록 2009-07-03 02:27 수정 2020-05-02 19:25
폴라니는 시장 질서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심성과 질서를 시장주의라는 맷돌에 갈아넣어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원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오는 단어다. 블레이크는 그림도 그렸는데, <거대한 전환> 한국어판 표지에 그의 그림을 실었다. 그림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형상화한 <회오리 바람 속의 연인들>이다. 시장주의 회오리에 휘말린 우리의 자화상을 은유하고 있다. 도서출판 길 제공

폴라니는 시장 질서를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인간 본연의 공동체적 심성과 질서를 시장주의라는 맷돌에 갈아넣어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원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오는 단어다. 블레이크는 그림도 그렸는데, <거대한 전환> 한국어판 표지에 그의 그림을 실었다. 그림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형상화한 <회오리 바람 속의 연인들>이다. 시장주의 회오리에 휘말린 우리의 자화상을 은유하고 있다. 도서출판 길 제공

칼 폴라니의 (도서출판 길)이 마침내 완역 출간된다. 7월4일부터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다. 전체 658쪽 분량 가운데 해제만 100쪽이 넘는다. ‘안내의 글’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이야기다. 영문판 완역본이 국내에 출간되는 것은 처음이다. 출판사 쪽은 “폴라니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헝가리 출신 경제학자인 폴라니는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시장주의의 허구를 폭로했다. 1944년 출간된 은 그의 대표 저작이다.

이례적으로 열흘 만에 정원 넘겨

753호는 표지이야기(‘호혜평등의 경제, 칼 폴라니를 주목한다’)에서 ‘폴라니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당시 기사에선 5월 말쯤 이 출간될 것이라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보’가 됐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은 “보도 이후 책이 언제 나오느냐고 묻는 전화만 100여 통 받았는데, 방대한 분량의 번역에 공을 들이고 여러 해제와 주석을 덧붙이느라 늦어졌다”고 말했다.

때맞춰 폴라니를 공부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겨레문화센터는 7월7일부터 21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세 차례에 걸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자본주의 경제의 새로운 길 찾기’를 주제로 강좌를 연다. 책을 번역한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직접 강의한다. 수강생을 30명까지만 받는데, 6월25일 현재 이미 25명이 수강을 신청했다. 인문 강좌로선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주최 쪽은 설명했다. 8월 중에 같은 강좌를 하나 더 열어볼까 고민 중이다. 문의는 02-3279-0909.

참여연대도 ‘위기의 시대에 읽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강좌를 연다. 7월9일부터 30일까지 네 차례 진행되는데 50명 정원을 이미 채웠다. 송은희 참여연대 간사는 “원래 40명만 받으려 했는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50명으로 늘렸고, 현재 대기자만 15명 정도다. 학생들보다 회사원들의 참여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 주최 사회과학 강좌가 알림을 내보낸 지 열흘 만에 정원을 넘기는 일 역시 이례적이다. 대기자 명단에라도 이름을 올리려면 02-764-9581로 연락해보면 된다.

올해로 10번째 행사를 맞는 ‘맑시즘 2009’의 수용 능력은 조금 더 넉넉하다. ‘고장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를 큰 주제로 잡았는데, 주요 세션 가운데 하나로 ‘맑스 vs 케인스 vs 폴라니’가 잡혀 있다. 7월23일부터 26일까지 고려대 서울 안암동 캠퍼스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의 구체적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참가하려면 사전에 신청을 해야 한다. 02-2271-2395.

홍기빈 연구위원은 4월 이후 지금까지 6~7차례에 걸쳐 폴라니 관련 강연을 했다. 20~30대의 젊은 사람들, 환경·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 경제위기의 실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폴라니를 공부하려 한다. “근본적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 공통적이에요. 시장경제 질서라는 건 완전히 유토피아고 역사적으로도 존재한 적이 없다는 폴라니의 사상을 듣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방식의 밑동부터 흔들린다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홍 위원은 가을 무렵 국내 학자들을 모아 ‘폴라니 학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경제위기 근본을 들여다보고 싶다”

최근 ‘폴라니 공부 소모임’을 만든 이경환(서울대 물리학과)씨는 “주식시장에서 손해 보지 않는 법 따위의 ‘속류 경제학’ 말고, 경제위기의 근본을 들여다보는 폴라니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캠퍼스 20여 곳에 공부 모임 참여를 제안하는 대자보까지 붙인 그는 방학 내내 폴라니를 공부한 뒤, 캠퍼스 전체에 폴라니 경제학을 전파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비슷한 종류의 폴라니 공부 모임이 고려대, 경희대 등에도 있다.

최근 발행된 계간 여름호에서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폴라니를 “시장의 자연 지배와 황폐화를 예언한 선구자”로 평가하고, “폴라니적 사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썼다. 무덥고 답답한 2009년 한국의 여름, 폴라니의 우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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