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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 와서 남·북 사이 선택을 강요하나

국적 바꾸지 않으면 입국도 거부당하는 재일 ‘조선적’ 동포들… 현 정부 들어 압박 사례 급증
등록 2009-06-12 10:56 수정 2020-05-03 04:25

‘조선적’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길이 막히고 있다. 최근 국내 학술제에 초청된 일본 대학의 연구원조차 ‘조선 국적’이라는 이유로 한국 입국이 금지된 사실이 확인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5일 열린 한·일 공동 심포지엄 ‘식민지기 재일조선인 사회의 형성과 단체활동의 전개’의 토론자로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정영환(28) 선임연구원을 초청했다. 재일동포 안치원(70)씨도 참석자로 초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한국에 오지 못했다. 각각 오사카총영사관과 고베총영사관에서 ‘여행증명서 발급 불가’ 방침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학술제 초청 토론자도 입국 막아

1947년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일괄적으로 조선 국적을 부여했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이후 남한과 북한 어느 곳도 모국으로 선택하지 않은 ‘무국적자’로 분류된다. 한국은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국제협약’과 여권법 등에 따라 이들에게 한국 입국 때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고 있다. 1999~2004년 5년 동안 외교통상부가 발급한 여행증명서는 1만1819건이고, 같은 기간 발급이 거부된 사례는 4건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여행증명서 발급이 거부당하거나 발급 과정에서 국적을 변경하라는 압력을 받는 사례가 빈번해 조선적 재일동포들 사이에 “한국 입국이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상기류’는 여행증명서 신청 서류를 접수할 때부터 감지된다. 정영환씨는 지난 4월 말 심포지엄 참석을 위해 오사카총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 신청을 할 때부터 이전과 다른 요구를 받았다. 그는 이미 지난 2006년과 2007년 두 차례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올해는 이전과 달리 서류 제출 때 ‘국적을 바꿀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써내야 했다. 영사가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정씨는 ‘(국적을 바꿀) 예정이 없음’이라고 표시했다.
얼마 뒤 영사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면접에서 담당 영사는 그에게 “왜 국적을 바꿀 예정이 없냐”는 질문을 했다. “별 이유 없다”고 하자 가족관계와 직장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영사의 요구로 정씨는 자신의 논문 2편도 제출했다. 이후 여행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아 정씨가 5월22일 영사관에 전화를 하자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사카총영사관 “외교통상부의 견해”


이유를 묻는 정씨에게 영사관은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다. 정씨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적어도 학술대회의 경우 아무 문제 없이 여행증명서가 발급됐다”며 “영사 개인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조선 국적자에게는 여행증명서를 되도록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정책적 방침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재일 조선인 역사를 연구하는 그는 한국이 주체가 되어 열리는 첫 심포지엄에 참석하지 못해 “억울하다”고 했다. 또 그는 “연구자로서 지속적으로 한국에 가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4년간은 못 가게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며 “이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을 개최한 민족문제연구소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원보장이 확실한 젊은 연구자인데다 초청장까지 보냈기에 여행증명서가 발목을 잡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동선희 연구원은 “전에는 다 되던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며, 행사를 열흘 앞두고 토론자 참석이 무산돼 대단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가 오사카총영사관에 직접 연락을 해봤지만 “그동안은 배려해서 여행증명서를 내준 것인데 이번엔 어쩔 수 없다. 국적을 바꿨으면 좋겠다”는 말만 들었다.

오사카총영사관의 이성희 영사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조선적 재일동포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허”라며 “이는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외교통상부의 견해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외교통상부가 이러한 방침을 전해왔느냐는 질문에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앞으로 조선적 재일동포가 위급한 사유가 아닌 이상에는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공보팀은 “조선적 재일동포에게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10조에 따라 신원상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여행증명서를 발급하며 발급 횟수, 발급 기간 등에 대한 별도 내부지침은 없다”고 밝혔다.
재일동포 3세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극단인 ‘달오름’과 ‘MAY’의 공연도 여행증명서에 가로막혔다. 일본 오사카에 사는 김민수·김철의씨는 지난 4월24일~26일 제주도에서 열린 ‘4·3 평화마당극제’에서 ‘하늘 가는 물고기, 바다 나는 새’란 제목의 2인극을 펼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국 국적인 김민수씨와 달리 조선 국적인 김철의씨는 제주도에 갈 수 없었다. 여행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 일주일 전에야 ‘발급 불허’ 통보를 받은 이들은 결국 일본에서의 공연 모습을 영상에 담아 제주도로 보냈다.
한국에 공부를 하러 오는 조선적 재일동포들도 비상이 걸렸다. 지난 6월5일 한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박사과정 합격 통보를 받은 오인제(27)씨는 고민이 깊다. 이미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5월23일 한국에 입국하면서 영사관과 한 차례 씨름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사카총영사관의 영사는 “솔직히 북한이 남북관계에 노력을 하지 않으니 남북관계가 힘든데 조선적이면 북한 국적 아니냐”며 “국적을 바꾸겠다는 조건하에만 여행증명서를 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국적 변경에 확신이 들면 전화를 해라. 안 그러면 여행증명서 발급은 힘들다. 어차피 무국적자는 국내 대학에 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오씨가 “난민이든 무국적자든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자 영사는 “(교육받을) 권리는 있어도 (입학·입국 허가는) 해당 국가의 권한 사항이다. 대학도 대한민국 관여를 받는 기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씨가 지원한 대학 쪽은 “무국적자도 외국인 특별전형에 따라 우리 대학에서 공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오씨는 “국적 변경을 생각해보겠으니 일단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여행증명서를 발급해달라”고 말한 끝에 비행기를 타기 직전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도 한국 입국이 안 될까 불안한 그는 “우선 부모님이 있는 히로시마에 가서 그곳 영사관에 신청을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1년간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 겨울방학 때 일본에 갔던 오균(22)씨도 지난 1월 다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으려다 거부당했다. 영사관에 계속 연락했으나 “조선적이므로 3개월짜리 여행증명서밖에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애초 교환학생으로 갈 때는 1년 기한의 여행증명서를 받았다. 결국 가족사까지 사유서에 기술하고 나서야 영사는 6개월짜리 여행증명서를 내줬다. 영사는 그에게 “네가 지금 한국에 가면 간첩으로 취급받으니까 이상한 데는 가지 말고 편지도 보내지 말라”고 말했다.

기준도 근거도 없이 겪어야 하는 수모

지구촌동포연대는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자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준비하고 있다. 녹음 파일 등 증거가 될 만한 자료도 모으고 있다. 지구촌동포연대 배덕호 대표는 “명확한 기준이나 근거도 밝히지 않은 채 재외 동포의 입국을 거부하고 무국적자에게 국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말했다. ‘조선적’이란 신분 때문에 ‘한국이냐, 북한이냐’ 선택을 강요받으며 여행증명서 하나를 받는 데도 수모를 겪어야 하는 것이 2009년 한반도의 인권 현실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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