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죽음의 레이스

“살기 위해 달렸다”는 제보 쏟아진 한반도 평화국제마라톤,
주자에게 물 공급하지 않고 주로 표시도 제대로 하지 않아
등록 2009-05-19 04:58 수정 2020-05-02 19:25
거대한 배후나 음모나 이권이 걸린 것만 부조리는 아닙니다. 신설된 ‘딸랑이거’ 꼭지는 소소하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정작 당하는 사람은 분통 터지게 만드는 일상의 부조리에 경종을 울리는 코너입니다. ‘이래도 됩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독자들의 제보(han21@hani.co.kr)를 기다립니다. 편집자

한국 마라톤 사상 가장 고통스런 ‘지옥의 레이스’가 지난 5월10일 경기 파주에서 치러진 것으로 확인됐다. 임진각 일대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국제마라톤이다. 일산파주신문이 주최하고, 파주가 지역구인 황진하 한나라당 의원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경기 포기자가 속출했고, 일부는 달리는 도중에 물을 달라 외치며 민가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차량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아 두 번이나 달리기에 제동이 걸린 이도 있다. 경기 뒤 조직위 홈페이지엔 “살인미수” “살기 위해 달렸다”는 글들이 쏟아졌고, 종종 다운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번 행사를 “살인대회”라고 부르는 달리미 구보(가명·60·울산)씨의 하루를 추적했다.

나눠준 건 당분 든 군용 음료수
참가자 유아무개(27·경기 의정부)씨는 10km를 뛰었다. 도착과 함께 ‘초코파이’ 하나, 군용 음료인 ‘맛스타’를 받았다. 그는 “이런 졸속 대회가 다시 추진된다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길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진 참가자 유아무개씨 제공

참가자 유아무개(27·경기 의정부)씨는 10km를 뛰었다. 도착과 함께 ‘초코파이’ 하나, 군용 음료인 ‘맛스타’를 받았다. 그는 “이런 졸속 대회가 다시 추진된다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길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진 참가자 유아무개씨 제공

전날 밤 10시께 울산에서 출발했다. 이튿날 서울 사는 딸이 새벽밥을 올린다. 사위는 눈을 비벼가며 서울역까지 차로 배웅해준다. 구보씨는 미안하다. 어쩌랴. 행사는 아침 9시고, 마라톤이 좋은 아비는 임진강 고라니처럼 달리고 싶다. 참가비 4만원이 아깝지 않다. 막상 출발 시간이 지체된다. 황진하 의원, 현인택 통일부 장관, 류화선 파주시장의 인사가 이어진다. 이것부터가 마라톤이라면 구보씨는 완주하겠다고 다짐한다. 내딛는 만큼 밀려나는, 원시적 역학이야말로 삶의 진리다. 인사들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스트레칭도 없이 출발 신호가 떨어진다. 신선한 폭력이다. 100m, 1km, 2km, 제 몸의 열기는 제 몸의 속도만큼 씻긴다. 그래서 여느 마라톤대회에서 그렇듯, 2.5km 지점에서 만나는 물 한 컵이나 수분 스폰지는 그 정직한 질주에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구보씨는 그 쾌감을 향해 달린다.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마라톤 좋아하는 사람들, 선물 바라지 않거든요. 급수, 교통통제 이 정도 배려만 해도 감사하며 뛰는 거죠.”

5월 아스팔트는 무장 달아오른다. 거리표지판도 없다. 얼마나 달려왔고, 어디서 속도를 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막’이다. 옆 차선에선 차가 내달린다. 10km 지점쯤인 것 같다. 구보씨는 처음으로 생수를 만난다. 보통 한 컵씩 진열해두는데, 500ml 달랑 3병이 급수대에 있다. 뒤에 오는 수많은 이들은 어쩌나, 구보씨는 질끔 눈을 감는다. 그래도 풀코스 참가자들은 하프와 10km·5km 참가자보다 먼저 출발했기에 물맛 구경이 잦았다. 다른 참가자 김아무개(49·경기 고양)씨는 5km 지점에 도착하자 급수대를 치우는 광경만 본다. 하프 반환점에선 군용 음료수 ‘맛스타’를 나눠준다. 달리미들은 뛰면서 당분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갈증을 부르는 독사과다. 달리 수가 없어 김씨는 한 모금 마신다. 스무 차례 마라톤 경력에 처음이다. 풀코스를 신청한 김씨는 결국 하프만 뛰고 들어왔다. 동호회원 15명 중 5명이 그랬다.

구보씨는 그래도 문산역을 지난다. 풀코스 반환점을 돈다. 여전히 급수대에 물은 없다. 임진강 줄기만 유유하다. 어느 지점에선가 누군가 남겨둔 생수병의 물 한 모금을 마신다. 구보씨 죽겠네. 결국 민가로 뛰어간다. 수도 호스로 온몸에 물을 뿌린다. 또 민가로 뛰어간다. 구보씨 죽겠네. 그 흔한 구급차도 못 봤고, 회수차(중도 포기자 운송 차량)도 못 봤다. 한 참가자는 자원봉사에 나선 해병대전우회 차량에 실려 들어왔다. 구보씨는 “이건 살인 행위”라고 되뇐다.

조직위 홈페이지에 공지된 사과문과 행사 안내.

조직위 홈페이지에 공지된 사과문과 행사 안내.

그를 살린 건, 풀코스치고는 아무래도 짧은 정체불명의 주로다. 이전 기록에 견주면 38km 남짓 될 법하다. 역대 최고 기록을 낸 구보씨는 자랑을 못한다. 그냥 “주최 쪽이 (특정 구역을) 한 바뀌 더 돌라는 안내를 하지 않았나 보다”고 생각한다.

결승점을 통과하며 ‘살아 돌아온 자’에게 주최 쪽이 사진을 찍으려 한다. 거부한다. ‘초코파이’ 하나와 맛스타를 준다. 맛스타는 후원단체인 군인공제회가 제공했단다. 복숭아맛, 포도맛… 또 하나가 뭐더라. 구보씨는 메달과 함께 던져버린다. 본부석을 보니, 인사했던 인사들 모두 가고 없다. 구보씨는 공원 수도에서 몸을 씻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전 내내 사선을 넘나든 자신에게 맥주 한 잔을 털어넣는다. 구름이 이들을 살렸다.

개운치 않은 ‘최고 기록’

참가자 임아무개씨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부모님과 부랴부랴 기차에 올라탄 이유는 4시간 넘어 들어온 달리미들이 울컥하는 마음에 난동을 피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경기 뒤 사흘 만에 200여 개 항의글이 조직위 홈페이지에 올랐다. 황진하 의원 쪽은 “2월 조직위원장 제의가 들어와 맡았고, 행사는 전적으로 일산파주신문이 책임졌다”며 “행사를 이렇게 망쳐 우리도 결과적으로 사기당한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황 의원의 도움으로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문화체육관광부, 군인공제회, 8개국 대사관 등이 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참석자들은 마냥 홀렸다. 황 의원 쪽은 “군인공제회의 맛스타(1만 캔) 말고 물질적 후원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행사의 결함이 본격적으로 노출된 건 등록신청이 마감된 4월 말부터다. 앞서 조직위는 일류급 세계적 선수도 참가한다고 공지했다 취소했다. 휘성 등 가수 공연도 예고했다 없앴다. 지방 참가자들에게 열차표를 준다 했지만, 모두 받지 못했다. 황 의원 쪽은 “대회가 끝나고 난 뒤 대회 참가자분들이 불편을 겪은 이야기를 전해듣고 임무 분담을 떠나서 조직위원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라는 사과문을 5월12일 올렸다. 일산파주신문의 이아무개 대표는 “물은 있었는데 컵을 못 가져가 문제가 됐다”며 “처음엔 기획사와 함께 준비하다 4월 초부터 신문사에서 전담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지역신문사 직원은 발행인까지 4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주최 쪽은 5월11일 사과문을 올렸다. “급수 문제, 주로 표시, 반환점 표시 문제 등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엎드려 사과드리며 용서를 구합니다. 대회를 후원해주신 황진하 의원님을 비롯하여, 정부기관·기업체에 깊은 감사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대표는 행사 중반에 추가 조달한 생수까지 모두 8400병이라고 말했다. 1210명이 뛰었으니 한 사람당 7병이다. 의무차 3대, 자원봉사자는 120명이 동원됐다. 하지만 마시고 기댔다는 이는 보기 어렵다. 임진강만 이 미스터리를 안다. 지친 이 대표는 “수입은 5천만원 정도로, 3천만원가량 적자가 예상된다”며 “환불 대신 다른 대회에 무료로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환불 대신 다른 대회 무료 참가 모색”

마라톤 코스가 공지된 지난 3월28일, 한 참가자는 이런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1회 대회니 별다른 기대 없이 지켜보다가 코스와 프로그램을 알고 나니 마구 기다려지더군요. 상금도 두둑하고, 먹을거리도 빵빵하다 하니…^^* 저는 하프, 아내와 딸아이는 5km를 뛸 예정입니다.” 기자는 그가 살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