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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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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덫에 빠진 입학사정관제

‘입시 정상화 대안’으로 2년새 예산 10배 늘렸지만 “손쉽게 고교등급제 적용하는 도구 될라” 우려 나와
등록 2009-04-23 08:30 수정 2020-05-02 19:25

그는 역사를 좋아했다. 다산 정약용의 스승인 순암 안정복이 경기 광주에 살았다는 사실을 안 뒤, 순암의 묘지를 답사지로 만들자고 시청에 직접 건의할 정도였다.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쌓였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도 땄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에 비견되는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국사·근현대사·세계사 과목은 내신과 수능 모두 1등급(상위 4%)을 받았다.

입학사정관제가 기존 대입 전형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다. 서울 소재 대학의 한 면접시험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입학사정관제가 기존 대입 전형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다. 서울 소재 대학의 한 면접시험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박은경(19)씨의 문제는 수학이었다. 시험을 치면 5등급(상위 60%)을 받을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담당 교사는 “너는 수학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못하는 수학’보다 ‘잘하는 역사’를 평가해주는 전형이 있었다. 박씨는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지난해 건국대 사학과 수시모집에 합격해 현재 대학생활 첫해를 보내고 있다. 수능·내신 등 점수로 드러나지 않는 능력을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가 아니었다면, 박씨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박씨에게 입학사정관제는 기존 대입 전형의 ‘대안’이었다.

정부 지원 강화에 대학들 대거 참여

입학사정관은 입학생 선발을 전문으로 하는 교수·전문위원·직원을 통칭한다. 이들은 학생부와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을 바탕으로 성적과 개인 환경, 잠재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학생을 선발한다. 이 제도는 2004년 10월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 개선안’에 처음 소개됐다. 2008학년도 입시부터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반영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만큼, “대학들이 학생부를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인적·행정적 역량을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손종현 경북대 입학사정관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통령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 상근전문위원으로 일했다. 이 제도의 도입 배경에 대해 손 사정관은 “단 한 차례의 수능으로 학생을 뽑으니까 학교 교육도 무너지고 대학의 전공 교육도 조잡하게 이뤄진다는 게 당시의 문제의식이었다”며 “고교 3년의 교육적 성취가 담긴 학생부를 중심으로 입시가 이뤄지면 학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사교육도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입학사정관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2008학년도 입시를 코앞에 둔 2007년 7월이었다. 시작은 단출했다. 시범 사업에 참여한 대학이 10곳(서울대·연세대·한양대·성균관대·가톨릭대·경북대·건국대·경희대·인하대·중앙대)에 그쳤다. ‘사교육을 잡을 수 있는’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대학의 관심이 그리 높지 않았던 셈이다.

사정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달라졌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입학사정관제 실시 대학은 40곳(표 참조)으로 늘었다. 지원 금액도 2007년 10곳에 총 20억원 수준에서 2008년 40곳에 모두 157억원으로 늘었다. 지난 3월11일 교과부가 발표한 ‘2009학년도 입학사정관제 지원사업 기본계획’을 보면 올해 지원금액은 236억원으로 더 늘어났다.

이 발표 직후 연세대·고려대·서강대 등이 경쟁적으로 입학사정관제로 뽑는 학생 비율을 크게 늘리는 ‘2010학년도 전형계획안’을 발표했다. 입학사정관제의 급격한 확대 이면에는 정부의 재정지원 약속이 있다. 올해 초 교과부는 입학사정관제 도입을 선도하는 대학에 많게는 30억원까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학원 선생님 도움 받아 소개서 등 작성

그러나 이 제도가 ‘중등교육 정상화’라는 원래 취지에 걸맞은 역할을 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적지 않다. 고3 수험생인 장종우(18)군은 “지난해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 대학에 입학한 선배 가운데는 해외 봉사활동 하나를 내세워, 그 경험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영학과에 합격한 경우도 있다”며 “돈 없는 사람들은 그런 건 엄두도 못 내는데, 결국 입학사정관제 역시 부자들을 위한 정책 아니냐”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 입학사정관제 지원사업 대상 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입학사정관제 지원사업 대상 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학생부에 다양한 이력을 채우려면 ‘매니저형’ 엄마의 구실도 커질 수밖에 없다. 고1과 고3 자녀를 두고 있는 여은주(42·경기 고양시)씨는 “입시설명회에서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엄마의 구실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학생부를 예전보다 꼼꼼히 평가한다고 하니 학교 선생님한테 기록을 잘 해달라고 압박해야 하고 밖으로는 다양한 대회나 봉사활동 정보를 찾아줘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을 평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슨 대회건 일단 참가시켜놓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

결국 입학사정관제 역시 사교육의 덫을 비켜갈 수 없을 거라는 게 현장 교사들의 판단이다. 전동근 포항제철고 교사는 “학생들이 자기 적성과 진로를 찾아 관련된 활동을 해야 입학사정관 전형에 맞춤한 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이러면 아무래도 입시는 개별화될 수밖에 없다”며 “개인한테 많은 책임이 부과되면 부모들이 사교육에 기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등을 주로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 전형이 사교육의 힘을 빌리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양우(20·연세대 외국어문학부 2학년)씨는 “서울대에 응시할 때 논술학원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작성했다”며 “제한된 분량으로 내 경험과 능력을 글로 표현하는 게 고교 3학년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인천 지역 고등학교의 한 진학담당 교사도 “서울대 특기자 전형처럼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액의 컨설팅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며 “따로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자녀들만 자기 손으로 직접 작성한다”고 전했다.

입시학원은 알지만 언론은 모르는 정보들

이미 자기소개서 쓰는 일을 ‘사교육 컨설팅’에 의존하고 있는데, 입학사정관제가 이를 더 부추길 것이라는 이야기다. 조용히 환호하는 것은 사설학원들이다. ‘새로운 시장’이 등장한 셈이기 때문이다. 입시에서 논술 반영 비율이 대폭 줄면서 문 닫을 위기에 처했던 논술학원들이 입학사정관제에 따른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작성 시장을 노리고 있다. 전동근 포항제철고 교사는 “입학사정관들은 이런 사교육의 도움의 받은 학생을 가려내겠다고 하지만, 결과를 검증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말했다.

학생·학부모·교사가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입학사정관제를 운용하는 각 대학의 ‘신뢰성’이다. 주부 이미경(46·서울 강남구)씨는 “지난해 고3 수험생 딸이 어느 대학에 실기고사를 보러 갔는데 (학원에 다닌) 학생들이 실기고사 문제를 이미 다 알고 있더란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 정도로 사설학원과 유착돼 있는 게 대학인데 무얼 어떻게 믿으란 거냐”고 말했다.

지난 4월10일 사설 입시기관인 ‘유웨이에듀’가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한 입시설명회 자료를 보면 고려대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다. 모집인원에서 전형방법까지 내용이 상세하다. 그러나 같은 날 관련 내용을 묻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고려대 입학처 관계자는 “입학사정관제 전형과 관련해 언론에 보도할 만큼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설 입시기관인 ‘이투스’의 유성룡 입시정보실장은 “학부모나 학생이 가장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 언론인데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는 정보를 강남에서 열린 입시설명회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게 무얼 의미하겠느냐”고 말했다. 입학사정관제를 둘러싼 대학과 학원의 ‘정보 공유’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 4월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전국 대학 총장들에게 입학사정관제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정용일 기자

지난 4월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전국 대학 총장들에게 입학사정관제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정용일 기자

미국에선 유대인 합격률 낮추려 도입

애초 정부가 모델로 삼았던 미국의 입학사정관제가 소수자·약자 배려 차원에서 도입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입학사정관제도의 공정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박남기 광주교대 총장은 “1920년대 미국에 입학사정관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동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의 합격 비율이 크게 늘면서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비주류’ 계층인 유대인의 합격률이 높아지자 기존 주류 계층이 이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도입했다는 것이다.

시험 성적 외에도 성격, 사회적 배경, 스포츠 활동 등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뽑는 일들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이어 1940년대부터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의 명문대를 중심으로 재정 확보를 위해 기부금을 내는 동문의 자녀를 우대하는 특별전형을 실시했다.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를 무조건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 총장은 “사립대에 ‘좋은 학생’이란 졸업한 뒤에도 넉넉한 기부금을 내줄 만큼 경제력을 갖춘 학생”이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립대도 미국의 사립대와 같은 처지에서 입학사정관제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나마 미국에서는 입학사정관들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높여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길을 걸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경우, 입학사정관 7명, 협력사정관 6명, 보조사정관 5명 등 20명 정도가 1년 내내 신학생 선발 업무를 도맡는다. 이들은 임시직 4명, 재학생 가운데 선발한 보조직원 24명, 입학 업무를 돕는 2500명의 자원봉사자 등을 거느리고 있다. 방대한 인력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학생 개인의 특성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국내 대학들이 이런 수준의 인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2007년에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국내 10개 대학의 경우, 모두 42명의 입학사정관을 뒀다. 대학당 4명 정도가 배치됐다는 이야기다. 이 가운데 현직 교수를 제외한 외부 채용 인력은 모두 1년 계약직이다. ‘적절한 인재’가 입학사정관이 될 가능성을 대학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셈이다. 한 지방대 입학처 관계자는 “교육 현장 경험이 있는 진학담당 교사가 이 분야의 적임자일 텐데, 현 정부 이후 입학사정관제가 흐지부지되면 그대로 실업자가 될 위험이 있으니 누가 선뜻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은 정부가 컨트롤해야”

이 때문에 여러 능력과 조건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별 자율’에 맡기는 입학사정관제의 급속한 확대가 대입과 관련한 각종 문제점을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학생부를 통해 학생의 개성을 파악하기보다 새로운 형태의 고교등급제를 더욱 손쉽게 적용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크다. 인천 ㅅ여고의 한 교사는 “입학사정관제는 결국 ‘비교과 영역’을 보겠다는 것인데, 결국 특목고와 비평준화 명문고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며 “부모의 도움을 받아 각종 대외 활동에 참가함으로써 부진한 성적을 만회할 수 있는 아이들은 특목고의 부유층 자녀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박남기 총장은 입학사정관제의 ‘공정성 확보’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성과 공정성이 생명인 우리나라 입시 환경에서는 입학사정관제가 기초생활수급권자나 농어촌 학생들처럼 교육 기회가 부족한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식으로 활용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손종현 경북대 입학사정관도 “대입 자율화가 대세라고 하지만 요즘 일부 사립대가 보이는 행태를 보면 입학사정관제 전형만큼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컨트롤타워’ 구실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한겨레 교육컨텐츠팀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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