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려대가 이슈의 중심이 됐다. 2009학년도 수시 2-2 전형에서 고교등급제를 적용했고, 또 이 과정에서 사고까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일선 고등학교 교사들이 나서 문제를 제기하고 상당수 교육 전문가와 교육 관련 단체들도 “고려대가 책임 있는 설명을 내놔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고려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전형은 학교 자율이기에, 구체적인 기준을 외부에 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온전한 진실이야 고려대 당국만이 알겠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번 사건이 우발적으로 터진 사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려대가 고교등급제를 적용했다는 의혹은 하루이틀 사이에 나온 것이 아니다. 2004년 8월 어윤대 당시 고려대 총장은 “고교 간 학력 격차를 입시에 반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연세대 의대 수시 합격생 12명 가운데 서울 강남 출신이 11명이라는 보도와 겹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명문 사립대들의 고교등급제가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여론에 밀린 교육인적자원부가 실태조사에 나섰고, 그 결과 고려대가 연세대·이화여대·성균관대와 함께 고교등급제를 실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고려대는 전형 반영 비율이 12.5%인 석차 백분위와 5%인 서류평가에서 고교별 최근 3년간 진학자 수 등을 고려해 0~1점의 ‘보정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고교등급제를 시행했다. 직전까지 “고교등급제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던 고려대는 결국 교육부에 “고교등급제를 시행하지 않겠다”는 개선 계획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려대의 특목고생 선호는 여전했다. 2005학년도 대입 이후 수능점수 반영 비율을 높여 특목고 학생들을 대거 유치하면서, 학생부 성적을 50% 이상 반영하도록 지침을 내린 교육 당국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었다. 고려대의 이런 움직임은 연세대를 자극했고, 연세대와 고려대는 나란히 특목고생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고려대는 2007학년도에도 교육 당국의 내신 강화 지침에 맞서 수능 우선 선발제도를 고수해 갈등을 빚었고, 지난해에는 본고사형 논술을 출제해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지난 1월 이기수 총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쓰신 분들의 자손이 학교에 들어올 때 배려하는 식의 기여입학제는 필요하다”고 밝힌 것까지 포함하면, 고려대는 최근 몇 년 동안 ‘3불 정책’(고교등급제·본고사·기여입학제 금지) 모두에 대해 노골적인 흔들기를 진행해온 셈이다.
고려대의 이같은 ‘청개구리 입시 정책’은 결국 손쉽게 특목고 출신들을 뽑아보자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문제가 된 2009학년도 수시 2-2 전형 논란은 전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는 “다른 대학도 그렇지만 고려대도 고교등급제를 여전히 해왔다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다. 사실 이번 파문은 고려대가 ‘수시 1단계에서 내신을 90%를 반영하고 10%만 비교과 영역에서 반영하겠다’고 전형 기준을 공표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예전에는 논술 성적 등과 합산을 했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를 했더라도 발각이 안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고려대의 특목고 출신 학생 비율은 이상하리만치 높다. 최근 권영길 의원(민주노동당)은 전국 고교의 1%가량에 불과한 외고 출신이 연세대와 고려대 입학생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자료를 내놨다. 외고 출신 비율은 특히 인문계에서 40%대까지 높아졌다(표 참조). 이는 특목고생들의 학업성취도가 일반고에 비해 높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높은 수치여서, 고교등급제를 통해 특목고생을 대거 유치한 것이라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고려대의 이같은 입시 정책은 공교롭게도 고려대 전체에 불어온 큰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고려대는 2003년 어윤대 당시 총장 취임 뒤 대학 변혁의 선두에 섰다. 기업과 동문들을 상대로 거액의 기부금을 모아 대형 건물들을 잇따라 세웠고, 졸업인증제를 도입해 학생들에게 토익 700∼800점 이상, 한자능력 외부 인증시험 2급 이상, 영어 강의 수강 등을 의무화했다. 또 신임 교수 채용 때 영어 강의를 의무화했으며,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논문 일정 수 이상 게재 등 임용 및 재계약 기준도 대폭 강화했다. 규모와 경쟁,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다.
고려대의 이같은 변화는 다른 대학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영수 서강대 입학처장은 “사실 기존에는 연세대는 연세대의 위치, 고려대는 고려대의 위치가 있었는데, 고려대가 그런 틀을 깨고 나섰다. 학교 본부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며 “영어 강의 확충, 외국 석학 유치, 왕성한 시설투자 등은 다른 대학에도 큰 자극을 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어윤대 전 총장은 학교 ‘대표주’를 막걸리에서 와인으로 바꿈으로써, 변화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국철학 교수도 ‘외국 출신’ 고집하지만 고려대의 이런 변화는 많은 그늘도 만들었다. 고려대 문과대의 한 교수는 “고려대가 대학들의 변화를 선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변화는 경쟁의 가속화이자 대학의 시장화였다”고 평가했다. 교수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얼마나 좋은 책을 쓰고 좋은 교육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논문을 게재했느냐는 계량적인 수치와 더불어 외부에서 연구비를 얼마나 많이 끌어오느냐가 평가 기준이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과대 교수는 “고려대가 신자유주의를 자진해서 제일 먼저 받아들인 셈인데, 더욱 큰 문제는 그런 변화와 관련해 어 전 총장이 학교 구성원의 동의를 구한 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스꽝스런 일들도 벌어졌다. 영어 강의 의무화 정책이 펼쳐지면서 한국철학 전공 교수 채용이 늦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대학 본부에서 영어 강의가 가능한 외국 대학 출신만을 고집해, 학과에서 뽑으려던 본교 출신 교수 채용이 몇 년 지연된 것이다. 이같은 부작용은 한국사학과, 정치외교학과 등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90년대 학번인 정경대의 한 박사과정 대학원생은 “전교생을 해외 유학 보낼 것도 아니고 학교가 영어학원도 아닌데, 뭣하러 단군신화까지 영어로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마도 영어 수업 추진의 이면에 외국인 학생 영입이라는 목적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70년대 학번인 한 교수는 “독일에 점령돼 어쩔 수 없이 모국어 수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프랑스인들 이야기인 을 교과서에서 보고 자랐는데, 고려대는 희한하게도 스스로 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따라잡았다” 자화자찬그렇다면 고려대가 이같은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총장의 개인적 소신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홍일식 총장 시절엔 고려대의 모든 학생들에게 삼강오륜과 같은 충효사상에 대한 과목을 의무적으로 수강하도록 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그에 반해 경영학과 출신의 어 전 총장은 ‘민족 고대’ 대신에 ‘국제화 고대’ ‘효율과 경쟁력의 고대’를 비전으로 제시하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밀어부쳤다.
물론 이같은 변화는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것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입학생 수능점수 커트라인이나 사회적 평판에서 확실히 앞서 있던 서울대나 연세대를 이기기 위한 ‘당연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입시생들 사이에서 ‘3등 대학’으로 통하던 고려대가 1·2등을 한꺼번에 제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명문 대학 따라잡기가 아니라 세계 대학과의 경쟁을 구호로 내세운 것이다. 고려대 세종캠퍼스(충남 연기군)의 한 교수는 “개교 100주년(2005년)을 준비하면서 국내 대학을 넘어 세계 대학들과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것으로 기억한다”며 “이같이 강한 경쟁심의 밑바탕에는 승리에 대한 강박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콤플렉스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기수 총장이 내놓은 발언에서도 이런 경쟁심과 콤플렉스가 읽힌다. 그는 “경영대는 단연 우리가 (연세대에 비해) 앞선다. 우리는 경영대 교수가 90명이다. 연세대는 65명이고 서울대는 45명이다. 승부는 판가름나 있다”라고 말했다. ‘연세대 단과대 가운데 대표주자 격인 경영대(상대)를 드디어 따라잡았다’는 자화자찬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은 셈이다.
결국 종합해보면, 최근 고려대는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 무한 경쟁주의를 스스로 내면화했다. 이런 큰 변화 속에서 입시와 관련해선 특목고생 우대 정책을 펴왔다. 어 전 총장은 퇴임했지만, 그같은 기류는 더욱 강화됐다. 이기수 현 총장은 “영어는 필수이고 제2·제3 외국어도 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다잡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고려대가 1·2등 대학을 따라잡기 위해 꽤 그럴듯한 목표를 제시했지만, 실무 능력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번 수시전형 사고 의혹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고려대 교직원은 “이번에 문제가 된 입시 사정 방식은 통계학과 출신인 전임 입학처장이 개발했다. 고급 통계학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것을 개발해 적용했다고 하는데, 이게 단순히 수치만 집어넣어 돌려도 되는 대목이 있는 반면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 하는 대목도 있다고 한다. 새로 바뀐 입학처장을 비롯한 현재의 입학팀이 그런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 일이 커진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돌고 있다”고 말했다.
대원외고에 다니는 딸을 둔 한 학부모는 “문제가 된 1차 전형에서 외고생들이 대거 합격한 것은 맞지만 실제 2·3차 전형에서는 탈락자들도 많다. 학부모들 얘기를 들어보면 ‘고려대가 괜스레 사고를 쳐 외고 학생들까지 한 묶음으로 욕을 먹고 있다’며 분개하는 분위기가 많다”고 말했다.
학생·교수 ‘자기반성’ 목소리 못 내입시 사고 의혹이야 일단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일은 고려대가 전 사회적인 재조명을 받는 계기가 됐다. 물론 그 내용은 고려대가 경쟁과 효율만을 최우선시하면서 아카데미즘이 가져야 할 본래의 가치들, 즉 △휴머니즘에 바탕한 인류공동체적 가치 추구 △창조적·비판적 지성인의 양성 △진리 탐구를 통한 공동체에의 기여 등에서 너무 멀어지게 됐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학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대학다운’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 대다수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바쁘며, 이런 상황은 교수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80년대 학번 한 교수는 “사실 교수들 스스로 점점 더 공적 이슈에 관한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 얘기해도 먹히지 않는다”며 “최근 입시와 관련해서도 사회적으로 이 정도로 논란이 됐다면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솔직히 그런 힘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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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의 고려대생들이 고려대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2005학년도 신입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성적에 맞춰서 37% △평소 좋아해서 22.7% △주위 권유 11.2% △사회적 명성 8.4% △높은 취업률 7.7% 순이었다. 고려대의 전통적 이미지와 직결되는 ‘전통과 교풍’이나 ‘좋은 선후배 관계’를 든 비율은 각각 5.2%, 3.1%에 그쳤다.
글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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