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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평판 시스템’에 맡겨라

찬반 추천·내공 부여 장치 통해 자율 정화… ‘온 유죄·오프 무죄’도 모순
등록 2009-01-23 10:37 수정 2020-05-03 04:25

미네르바로 지목된 박아무개(30)씨의 형사처벌을 계기로 한국의 인터넷 규제에 대한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망 속에서 쏟아져나오는 글들을 일일이 ‘단죄’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되레 조금씩 발전해온 인터넷의 자정 능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도입하려는 사이버모욕죄는 온라인에 대한 가중처벌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12월10일 민생민주국민회의 등 소속 회원들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서 ‘사이버모욕죄 반대’ 등의 내용을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한나라당이 도입하려는 사이버모욕죄는 온라인에 대한 가중처벌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12월10일 민생민주국민회의 등 소속 회원들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서 ‘사이버모욕죄 반대’ 등의 내용을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신고 시스템에 기반한 민간 규제로

일정한 한계 속에서도 인터넷은 나름의 ‘평판 시스템’을 기반으로 진실과 거짓을 스스로 가려왔다. 하나의 사실이나 주장이 제시됐을 때 수많은 누리꾼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사실과 주장을 펼침으로써, 결국 ‘집단지성’이 발현돼온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특화된 게시판 문화 속에서 댓글을 비롯해 찬반 추천, 내공 부여 등 다양한 의견 개진 방식은 평판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둥이다. 전문가들은 미네르바의 형사처벌이 누리꾼들을 위축시키면서 앞으로 활성화해야 할 이런 기능들까지 약화시킬 것으로 전망한다. 강장묵 세종대 교수(컴퓨터공학)는 “인터넷은 ‘선 검열·후 출판’이라는 아날로그 매체와 달리 ‘선 출판·후 검열’ 성격을 갖고 있어 기존 법규와는 논리가 맞지 않는다”며 “국가가 아니라 사이트에서 평판으로 (진위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온라인에서의 글쓰기에 대해 오프라인의 실정법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징역형에 처하는 사법처리 방식보다는, 평판 시스템에 따라 거짓은 도태되고 진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율규제 기능을 강화하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황용석 건국대 교수(신문방송학)도 “(인터넷에 대해) 법적 규제가 아니라 이용자들의 신고 시스템에 기반한 민간 규제로 가고, 아주 불법적인 것은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협력 모델로 가는 게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한국정보사회진흥원이 지난해 12월 내놓은 ‘해외 주요국 인터넷 규제 현황과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정책자료집은 정부의 인터넷 정책이 세계적인 흐름과는 거꾸로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자료집은 “업계를 대표할 수 있는 사업자단체의 공동 자율규제 체계 구축이 필요하며, 공적인 인터넷 규제는 사업자와 이용자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범위로 한정돼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자료집에 나오는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정부 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을 규제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일본·영국·프랑스는 민간 자율기구가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과 싱가포르는 민간의 자율규제를 정부가 승인하는 방식이다. 주요 규제 내용도 한국은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 지적재산권 침해 등에 치중돼 있으나, 다른 나라들은 폭력·포르노물 등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고 인종차별을 규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날로그 매체들 익명의 글쓰기는

동시에 오프라인에 비해 차별적으로 온라인을 규제하는 현행법의 거품도 빠져야 한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는 “인터넷 댓글이 저열해 보이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사석에서 욕도 하고 동네 담벼락에 익명으로 욕지거리도 쓴다. 인터넷만 차별적으로 규제하자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날로그 매체에서는 가능한 익명의 글쓰기와 인터뷰도 인터넷에서는 실명제로 무력화하고, 같은 내용이라도 오프라인 학술지에 실리면 죄가 되지 않을 사안도 인터넷에 실리면 전기통신기본법 등으로 처벌하는 건 지나친 규제라는 것이다. 또 당사자가 요구하면 온라인에서 글을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등의 규제 조처도 오프라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사이버모욕죄까지 입법해 당사자의 신고 없이도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은 인터넷 죽이기와 다름없다는 게 박 교수의 지적이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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