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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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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거리에서

등록 2009-01-06 05:20 수정 2020-05-02 19:25

화려한 시상식 프로나 보면서, 따뜻한 아랫목에 등이나 지지면서 졸고, 그러다 눈 비비면서 새해 인사나 하고 다시 자고, 이러는 게 최고다. 그래서 추운 밤 보신각 종소리 들으러 가는 사람들이 신기했더랬다. 이런 자세니, 그믐밤 유인물 돌리러 종로에 나가야 한다고 했을 때 원망스러울밖에. 농성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밤잠을 설치며 이틀 밤을 보낸 뒤라 비몽사몽 제정신도 아니었고, ‘삼중 보온메리’를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에 투덜거림은 멎을 줄 몰랐다. 이런 된장, 직권 상정한다고 했으면 그냥 빨리 해버리든가, 왜 엄한 사람 고생시키냐… 요런 위험 수위까지 갈 뻔도 했다.

종로 거리에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종로 거리에서.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무슨 범죄행위가 목전에?

‘MB 악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촌스러운 유인물 절반을 나누고(나 같았으면 절대 안 받았을,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받아주신 것이 망극해 비굴 모드로 배꼽 인사, 정말 많이 했다), 슬슬 종로로 향했다. 탑골공원에서 간단히 집회를 하고 다시 종각으로 이동한다, 는 계획이란다. 그런데 정작 탑골공원 앞에서는 황당 장면 연출 중이시다. 종로3가역을 통해 탑골공원으로 오려던 사람들 중 ‘위험한 시위용품’- 그러니까 쇠파이프·곤봉·PC·스피커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양초·노란 풍선·손팻말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거다- 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막는단다. 아니, 경찰청장님 말씀 잘 듣고 타종 행사를 보러온 ‘시민들’과 스스로 ‘분리’하면서 따로 집회를 시작하려 했던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종각 쪽으로 향하면 더 빨리 섞이는 거 아닌가.

유인물을 들고 종각 쪽으로 향하는데 또 전경들이 인도를 막아선다. 직업병이 도져서 “근거 규정이 뭐냐?”고 했더니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란다. 어? 내가 그거 좀 아는데…. “범죄 행위가 목전에 행하여지려고 하고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관계인에게 필요한 경고를 발하고, 그 행위로 인하여 인명·신체에 위해를 미치거나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어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그 행위를 제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폴리스 라인 같은 거다. 유인물 들고 인도로 걸어가는 아줌마들이 대체 누구의 인명과 신체에 위해를? 무슨 범죄 행위가 누구 목전에 있다는 것임?

급한 성질 나와서 한번 밀어도 보고, “지휘관이 누구냐, 관등성명을 대라”며 배운 거 써먹어도 보지만, 요지부동이다. 그냥 유인물을 가방에 넣고 저쪽 횡단보도로 걸어가 무대 앞에서 뿌려버릴까. 무전기 들고 좀 있어 보이는 전경님한테 “이거 변호사들이 쓴 법률 의견서걸랑요, 이게 어디가 위험하다는 거예요?(형, 나 정말 궁금하거든?)” 들이대보지만, 대답도 잘 안 한다. 헬멧 쓰고 청바지 입은 사람들 수백 명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찻길로 달려와 옆에 서는 걸 보니, 더럭 겁도 나고 이러다가 새해 첫날 엄한 곳에 있게 될까 걱정도 된다(이러고도 법을 배운 여자라니…). 에라 모르겠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보신각 쪽으로 가는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줘버렸다(엄한 분위기 탓인지 사람들이 괜히 더 잘 받아줘 결국 보신각 쪽을 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유인물을 들고 가게 됐으니, 복잡한 곳 가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보다 낫기도 했고, 나중에 사람들이 더 많아져 우리가 서 있던 곳까지 늘어서자 인도를 막아선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긴 했다).

집시법 위반인 줄 알았네

그런데 사실 잠이 확 깨긴 했다. 그 전경 동생이 안 가르쳐줬다면, 하마터면 집시법 위반인 줄 알 뻔했다. 교통에 상당한 장애가 예상되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시위용품을 휴대하거나 보관·운반하는 것도 처벌하고, 그리고 나처럼 얼어죽지 않겠다고 목도리로 동여맨 사람들은 ‘비겁자’로 응징하겠다는 그 법, 벌써 통과된 줄 알았다.

종이 몇 장 들고 있다고 인도로 못 걸어간다는 말을 듣고 법 가지고 먹고산다는 ‘배지 단 사람들’조차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제야의 종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들어버렸다.

“악법은 그저 ‘악’일 뿐이라고!”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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