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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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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 조부 무덤에서 부친 편지

고 류낙진옹, ‘빨치산 가문’ 덧칠하는 세상에 가상편지
등록 2008-11-25 14:51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1월14일 보수논객 지만원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 슬하에서 자랐다’ 등의 글을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지씨가 문제삼은 ‘빨치산’은 2005년 4월 세상을 떠난 류낙진 옹이다. 그가 누구이길래 숨진 지 3년이 넘어서도 보수 논객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걸까. 그의 생전 모습을 지켜봤던 기세문·김정길·임종수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고인의 가상 편지를 재구성해봤다. 편집자
지난 5월20일 배우 문근영씨가 명동의 한 매장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오는 고객에게 화분을 나눠주는 ‘그린 라이프’ 행사에 참석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지난 5월20일 배우 문근영씨가 명동의 한 매장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오는 고객에게 화분을 나눠주는 ‘그린 라이프’ 행사에 참석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긍께 왜 잠자코 있는 사람을 자꾸 찾아싸. 지금 남원에 있지. 여기가 고향잉께. 집안 선산에 누웠어. 아늑하고 조용한 게 좋구먼. 괜히 사람들이 집적대는 게 싫었어. 벌써 3년이여. 누운 자리 옮긴 거 말이여. 그땐 참 해괴하고 황당하고 거시기했지. 뻘건 페인트를 뿌리더니 해머로 비석을 깨부숴버려야. 기엉코 묘도 파헤쳐불고. 나도 어쩔 줄을 몰랐재. 망측한 백골을 자슥들한테 보여줘부렀응께. 그게 2005년 12월이여.

경기 파주시 보광사였재. 스님들이 만들어준 자리였거든. 우리 같은 장기수들은 세상 떠나도 마땅히 누울 자리도 없응께, 불쌍타고 함께 묻어준 것이재. 그래도 그짝 사람들 보기엔 성가셨나보구만잉. 북쪽에 공작원으로 다녀온 사람들이라재?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남들이 그러드만, 난 암시랑토 안 혀. 암먼, 평생을 그렇게 지냈응게. 손꾸락질 받고 숨죽여 지내고….

차라리 내 묏자리를 또 파헤쳐불지

그려도 이참엔 좀 다르재. 누가 우리 외손니한테 ‘골수 빨치산 가문’이라 혔다매. 내가 난리 때 쩌그 산에 들어간 건 맞어. 남로당 남원군당 유격대에 있었재. 아무리 그려도, 할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고 워디 대대손손 빨치산인감?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재. 죄지은 게 있어도 교도소에서 내가 다 갚음 했응게, 정 못 참을 한이 있으면 차라리 내 묏자리 다시 파헤쳐부는 게 낫지, 자슥들 손가락질허진 말어.

금메 그런 꼴 안 당하려고 고향에 누운 것이여. 하먼, 사람들 모르는 데 조용히 있으려고 했재. 젊을 때 산 생활을 여기서 했응께, 맴도 편하고. 이짝에 누워 있자면 옛날 생각 많이 나재. 살았을 적엔 부러 옛날 이야기 많이 안 혔어. 같이 있던 사람들이 가끔 물어봐싸도 암말도 안 혔어. 머씨 좋은 이야기라고 그러겄어. 원체 내가 말수도 적었고 말이시.

남원에서 태어나긴 혔는데 다섯 살 적에 아버지 따라 일본으로 갔네. 하도 헐벗고 굶주리니께 머시라도 먹고 살겠다고 그때는 일본으로 만주로 많이들 갔재. 그랴서 어릴 때 고향 기억은 별로 읎네. 일본서 소학교하고 사범학교까지 마쳤응께. 해방되고 돌아왔재. 국민대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쪼깐 했었어. 그러다 전쟁이 터졌재.

이데올로기는 별로 읎었어. 거시기, 야심이랄까 포부가 있었재. 젊었응께. 외세 때문에 분단돼야선 안 된다고 생각혔지. 무슨 무슨 이념보다는 민족통일이 질로 중한 문제라고 생각혔지. 배고프고 못산 게 다 외세 땀에 그런 거 아닌가 말이어. 지리산 달궁이라고 아시요. 내 시름만큼 산이 깊었재. 골이 원체 깊응께 계곡물도 숨죽이고 흐르던 곳이요. 거기 터를 잡고 유격대 선전부 일을 혔어. ‘인텔리’라고 더러는 동지들이 비판도 혔지. 그때 일을 워떻게 말로 다 허겄소.

52년 봄에 잡혔재. 산에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는데, 고것이 내 젊은 날의 마지막 봄이요. 잡히자마자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재. 민간인 법정으로 옮겼는디 5년으로 감형해주더라고. 고때 죽어부렀으면 식구들 고생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재.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여. 맴대로 되는 일은 아니재.

57년에 나왔어. 산 생활 할 때 만난 시약시가 있었거든. 비슷한 때 잡혔고, 비슷한 때 나왔재. 까막소에서 나오자마자 결혼혔지. 식구가 생겼으니 워쩌겄어. 돈을 벌어야재. 막일했어. 공사장에서 날품 팔았재. 가족이라고 같이 보낸 게 고런 몇 년이 전부여. 꿈꾸는 것 같았재. 그러나 마나 군인이 대통령 되더니 63년에 또 잡혔부렀어. 혁신계 일을 했다고 시비 삼았재.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긴 혔는디, 71년에 또 잽혀 들어갔재. 통혁당 사건이었어. 신영복 선생도 그때 잽혀 들어왔재. 내가 그래도 사범학교 출신이라고 전남 보성에서 잠깐 선상질 할 적이여.

동생도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재
류낙진 옹은 2005년 4월1일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같은 해 4월5일 오전, 광주 현대병원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범민련 남측본부 제공

류낙진 옹은 2005년 4월1일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같은 해 4월5일 오전, 광주 현대병원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범민련 남측본부 제공

사형선고를 두 번씩 받아본 사람이 있을랑가. 판사가 사형이라고 하는디 암 생각도 읎었어. 나중에 2심에서 무기징역 받았재. 광주 교도소에 있는디 80년에 또 난리가 났어. 내 동생이 전남도청에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재. 나중에사 이야길 들었네. 세월이 가면 슬픔은 잊혀져뿌는 것이여. 안 그럼 또 워쩌겄는가. 마음에만 담았재. 잡혀 들어온 학생들이 단식투쟁 하면 내가 타이르기도 혔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쓴다고, 그래야 좋은 세상 본다고 혔지. 암먼 살아남아야재.

88년에 20년형으로 다시 줄었다가 90년에 가석방됐어. 그때 내가 맘에 안 좋은 일이 있었재. 전향서를 썼소. 그거 쓰는 바람에 작업장에 나가 일도 했재. 안 그러믄 방에만 갇혀 지내거등. 전향서 쓰고 작업장에 가서 아그들 공부하는 책상 만들었네. 취미 삼아 나무에 붓글씨도 새기고…. 할 말이 읎었재. 긍께 고것은 내 맘속에만 담아둔 이야기네. 아무도 그것 때문에 뭐라 한 적은 읎어. 그랴도 철저하게 비전향 장기수로 있었던 동무한텐 거시기, 맘으로 죄스러운 게 있재. 나중에 다시 잽혀왔을 때, 준법서약서를 거부한 적이 있는디, 고걸로 미안한 맴이 조깐 덜어지긴 혔어도…. 바깥에 나가서 몇몇하고만 내왕한 것도 그런 일 때문이여.

94년에 구국전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네. 나중에는 그게 조작된 거라고 하드마잉. 그러고 다시 6년 있다가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어야. 그게 99년이여. 내 나이 일흔하고도 한 살을 더 먹어부렀재. 우리 외손니가 나한테 무슨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디, 일흔이 넘도록 까막소만 왔다갔다 하는, 얼굴도 모르는 늙은이한테 어린 외손니가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겠능가. 아주아주 어릴 적에 부모 손 잡고 내 면회를 온 적은 있재. 그런 것도 하덜 말아야 빨치산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하겠능가.

나와서는 그저 소일만 혔어. 책 읽는 걸 좋아했으니께, 읽고 싶은 것도 다 못 읽고 수십 년을 까막소에서만 있었응께, 다 늙어 혼자서 철학이니 역사니 공부를 쪼깐 했재. 갇혀 있을 때 틈틈이 익힌 게 붓글씨니께 그거 써서 친구들한테 선물도 주고 그러믄서 살았재.

몇 안 남은 친구들한테 가끔 자랑은 혔어. 우리 손니 예쁘다고, 착하다고 그렸지. 나중에 보니께 친구들한테 말이 넘어들어와. 무슨 단체에서 홍보대사로 나서달라, 이런 영화를 찍으니 출연해달라, 그런 부탁이여. 민주단체나 역사영화 같은 것이었는디, 갸 엄마가 워낙 민감해하니께 한 다리 건너 나한테꺼정 부탁을 넣는 것이재. 그런 것도 받지 말라고 사람들한테 신신당부를 했소. 그담부터는 내 방에 있던 손니 사진도 없애부렸재. 날 알아도 손니는 아는 체하지 마라, 그런 뜻이었재.

갸 에미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네. 긍께 갸한테는 딸이 젤로 중하고 중하거든. 빨치산 어쩌고 고 따위 야그하는 사람들이야 얼마 읎겠지만서도, 뉴라이트니 뭣이 워낙 많잖어. 그런 것이 굉장히 신경쓰일 것이네. 민주화됐네 어쩌네 해도 친일 후손들은 조상 땅 찾겠다고 나서고 빨갱이 자슥들은 평생 암말도 못하고 사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여. 나 땜시 이런 글 나가는 것도 자슥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네. 나 죽고 나서는 장기수니 양심수니 하는 내 동무들도 갸 엄마한테 연락 안 하고 산다등마. 하먼, 서로 조심하는 것이재.

죽고 죽이는 생지옥, 또는 안 되잖어

이제 와서 내가 먼 할 말이 있겄능가. 죽어 땅에 묻힌 게 벌써 3년허고도 여섯 달이 지났어야. 죽기 전엔 이삼 년만 더 살았으먼 했는디, 숩게 죽진 않겄다고 동무들한테 말도 했는디, 살고 죽는 게 그렇게 허망하드만. 그저 자손들헌테 평생 눈물 바람 맞힌 게 미안헐 뿐이재. 장례식 때 큰아들놈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어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걸 용서해달라고. 우는 자식 놈헌티 꼭 말하고 싶었재. 용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디, 나 땜에 숨도 못 쉬고 몰래 피눈물 흘린 거 내가 다 안고 가야 하는디, 미안허다, 미안허다….

나넌 징헌 세상을 모질게 살았어. 그게 옳았는지 워쨌는지는 잘 모르겄어. 그래도 후회는 안 해야. 내 깐에 열심히 산다고 살았응께. 이젠 젊은 사람들이 한 세상 살아내야 허잖어. 긍께 존 일 헌다고 나같이 죽어 누운 사람 찾지 말어. 죽어뿌린 빨치산하고 좋은 일로 번 돈 좋은 일에 쓰는 배우하고 자꾸 한 이바구에 담덜 말어. 빨갱이 자슥, 빨갱이 친구라고 쏴죽여뿔고 반대짝에서 원수 갚는다고 또 죽여뿔고, 그런 생지옥을 젊은 사람들이 또 살 수는 없잖어. 그 낙인을 자슥들한테 물려주는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없잖어.


고 류낙진옹 약력
1928년 8월26일 전북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출생
1933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감. 히로시마에서 사범학교 졸업
1946년 남원으로 돌아옴
1950년 국민대 입학. 남로당 남원군당 유격대 활동
1952년 체포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 이후 민간재판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
1957년 만기 출소. 결혼
1963년 혁신당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집행유예로 석방. 전남 보성군 예당중 교사 생활 시작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 1심 사형선고, 2심 무기징역 선고
1980년 동생 류영선,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
1990년 전향서 제출 뒤 가석방
19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 1심 무기징역 선고. 2심 징역 8년 선고
19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
2005년 4월1일 별세
2005년 6월 경기 파주시 보광사 연화공원 묘역으로 이장
2005년 12월 대한민국 HID 특수임무청년동지회에 의해 묘역 훼손. 이후 남원 선산으로 이장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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