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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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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의미 새기며 출두 아닌 연행 택해”

광우병대책회의 박원석 실장 체포 직전 마지막 인터뷰
등록 2008-11-14 08:41 수정 2020-05-02 19:25

촛불 수배자들이 잡혔다. 지난 11월6일 새벽 1시께 강원 동해시 한 호텔에 숙박 중이던 수배자 5명을 경찰이 급습했다. ‘고스톱’ 치려다 붙잡혔다고 보수 언론은 썼다. 놀러온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화투와 술을 준비한 것이라고 변호인단은 설명했다. 체포당하기 직전인 지난 11월3일 과 만났을 때, 박원석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마지막 마무리 방식을 숙의 중이며, 이번주 안에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수배 생활의 회포를 풀기 위해 은밀히 모여 고스톱을 쳤는지, 마지막 기자회견을 논의하기 위해 지방 소도시에 모였는지는 상식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에 전한 그의 이야기는 ‘수배자 신분’으로 남긴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조계사 농성 시절, 박원석 실장을 비롯한 수배자들은 매일 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고 경찰의 폭력 진압을 규탄하는 108배를 했다. 조계사 농성 돌입 직후인 지난 7월9일 농성자들이 108배를 하는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조계사 농성 시절, 박원석 실장을 비롯한 수배자들은 매일 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고 경찰의 폭력 진압을 규탄하는 108배를 했다. 조계사 농성 돌입 직후인 지난 7월9일 농성자들이 108배를 하는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절에서 뛰쳐나와 교회로

절에서 뛰쳐나온 그를 교회에서 만났다. 마침 낮 예배가 열리고 있었다. 목사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예배당 밖까지 들린다. 기업인과 수험생의 앞길을 축복한 뒤 목사가 덧붙인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명박 대통령이 리더십을 펼칠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주시옵소서….” 교회 담장 바로 옆에 경찰서가 있다. 경찰은 서울경찰청 산하에 전담수사팀을 만들고 그의 체포에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경찰서 정문 옆 수배자 게시판에 그의 얼굴이 있다.

사진에 비해 그는 살이 조금 붙어 있었다. 수배자는 “마침내 삼겹살을 먹었다”며 웃었다. 그는 “나가면 후배들과 삼겹살을 먹고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118일의 농성 끝에 지난 10월29일 조계사를 나온 박 실장은 “촛불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리를 만들어 우리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곳에 들이닥친 경찰에 연행되는” 시나리오를 귀띔했다. 마지막까지 농성에 참여했던 다른 5명과 계속 숙의 중이라고 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그날’ 이후 박 실장은 당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도 뭔가 분풀이하고 싶겠지. 쉽게 내보내지도 않을 테고. 많이 맞는 거 아닌가 몰라요.” 웃지만 번민이 없지 않을,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어질 그에게 보수 신문의 표현을 빌려 물었다. 왜 ‘도주’했나. 더 감동적인 다른 종류의 마무리는 없었을까.

“농성자, 시민단체 활동가, 촛불시민들이 조계사에 모여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뒤에 절 앞에 지키고 선 경찰에게 걸어가자는 주장이 있었다. 촛불시민에 대한 졸렬한 보복을 중단하라고 정권에 요구하고, 우리가 책임지고 가겠다고 선언하고…. 모양새로 보면 그게 더 매끄러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게 약간 변형된 ‘자진출두’다. 촛불을 불법·폭력 시위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상황에서- 물론 촛불은 불법·폭력 시위가 아닌데- 수배당한 우리가 자진출두하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 있었다. 농성 중인 수배자들의 의견은 “어떤 경우에도 제 발로 걸어가는 모습은 안 된다”가 더 강했다. 무력하게 굴복하는 모습은 촛불시민의 기대에 어긋난다고 봤다. 짧은 시간이라도 밖에 나가 활동하고 저항하다가 잡혀가는 게 더 떳떳하다고 봤다.”저항하다 잡혀가는 게 떳떳

사뭇 흥미진진했을 ’도주’ 과정을 박 실장은 “지금은 안 된다”며 다 털어놓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조계사 경내에 놓아두어 경찰의 위치 추적을 피하고, 트럭 짐칸의 과일상자 사이에 몸을 숨겨 빠져나왔다는 경찰의 설명이 맞느냐고 물었는데, “그것도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 실장으로선 도움을 준 이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함께 농성하던 김광일 ‘다함께’ 대표가 나름의 사정이 있어 10월24일에 먼저 나갔다. 그 뒤로 경찰이 더욱 조여왔다. 경찰이 조계사 경내까지 24시간 감시했다. 6명 가운데 하나라도 농성 천막에서 사라지면 경찰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틈을 봤다. 밤이나 새벽은 오히려 사람이 적으니, 인파가 붐비는 대낮에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나가기로 한 날이 초하루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조계사 농성에 들어갈 때의 목적이 달성된 측면도 있었다. 당시 촛불 이후의 대안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는데 수배령이 떨어졌다. 잡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후 석 달여 논의 끝에 ‘민생·민주 국민회의’가 결성됐다. 촛불을 이어갈 새로운 연대기구를 만들자는 목적도 일단 이뤄졌다. 그런 상황에서 농성을 이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체포되기 싫어) 개인의 신병에 연연하는 모습이 될 판이었다.” 후일 도모 위해 국민회의 출범

민생·민주 국민회의 준비위원회는 10월26일 만들어졌다. 집행부가 조만간 구성되면 정식 출범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 정당의 참여는 확실하다. 민주당을 끼워줄지 말지는 내부 논란 중이다. 결론이 어찌 나건 시민사회와 야당의 조직적 연대는 1987년 5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출범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회의는 역사적 조직이다. 운동권 용어로 풀자면 ‘전선체’의 부활이다. 87년에는 반독재 전선, 2008년에는 반이명박 전선이다. 20년 전 국민운동본부는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국민회의도 그 정도의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는 국민운동본부에 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에 비할 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 다르다. 87년에는 정치적 재야가 있었다. 제도 정치 바깥에서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은 정치적 재야가 사라졌다. 87년에는 재야와 별 차이 없는 야당도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강력한 정치적 구심 노릇을 했다. 그 시절엔 김대중이 대중집회를 열면 수십만 명이 모였다. 지금의 야당은 그런 영향력이나 동원력은 물론 전략 능력도 없다. 시민운동을 보면, 지난 20년간 운동의 영역과 자원은 넓어졌지만, 그 시절과 같은 강력한 구심력은 없다. 다 흩어져 있다. 그만큼 내부 차이도 더 커졌다. 그래서 국민회의 결성에 대한 논의가 쉽지 않았다. 촛불이 가라앉는 국면이어서 논의에 탄력이 붙지 않았다. 각 단체들은 각개격파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촛불이 한창일 때는 상황 전체를 고민할 수 있었지만, 촛불이 잦아들고 정권의 탄압이 시작되니 저마다 발등의 불부터 꺼야 했다. 그래도 후일을 기약하는 테이블을 만들자는 문제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국민회의가 출범할 수 있었다.”

국민회의 결성은 몇몇 단체가 ‘주도’하고 다른 단체들이 ‘공감’하는 수준에서 이뤄졌다. 여기저기 성긴 구석이 적지 않다. 87년 국민운동본부의 결속력과는 천양지차다. 다만 그 시절에 못지않은 공감대가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 ‘조직적·체계적으로’ 개입하자는 게 현재 시민사회 전반의 정서다. 박 실장이 말하는 ‘후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선거는 정당이 치른다. ‘광장의 정치’조차도 정당을 매개 삼지 않고는 선거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민주당은 믿을 수 없고 진보 정당도 성에 차지 않는다면, 아예 시민운동 세력이 정당을 만드는 건 어떨까.

농성 기간 내내 경찰은 조계사 주변을 둘러싸고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왼쪽). 지난 8월5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박원석 상황실장이 시민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이종근 기자(왼쪽부터).

농성 기간 내내 경찰은 조계사 주변을 둘러싸고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왼쪽). 지난 8월5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박원석 상황실장이 시민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이종근 기자(왼쪽부터).

시민사회 중심 놓고 정치세력 활용 “그건 쉽지 않다. 진보 정당을 포함해 이미 정당이 있다. 시민운동 내부에도 과거에 비해 다양한 갈래가 있다. 스스로 정당이 되는 방식의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는 사람도 있고,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단일 정치 세력화를 논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건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은 곧 다가올 정치 일정을 예견하면서 고민해야 한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 진보 정당들이 각각 나서면 서울과 수도권은- 영호남은 이미 예상되는 바이고- 또다시 한나라당이 석권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뚜렷한 답은 없지만, 정당의 선거 공학에 휩쓸리지 않고 시민운동의 중심을 지키면서 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하는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여러 정당 후보 가운데 옥석을 가려 단일화하는 과정에 시민사회가 적절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구상인 셈이다. 지난 7월, 서울시교육감 선거 때 ‘촛불 후보’로 각광받았던 주경복 건국대 교수의 사례를 참조하는 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교육감 선거는 정당 사이의 경쟁이 아니다. 지방선거, 총선, 대선 등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 시민단체가 말한다고 선거판의 정당이 과연 움직일까? 정당이 그 정도로 고분고분할까?

“물론 시민사회가 (정당에 대해) 헤게모니를 발휘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은 기성 정당의 몫이기도 하다. 그들도 시민사회의 역량을 끌어안을 생각을 해야 한다. 민주당의 한계를 모르지 않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다- 반이명박 전선에 민주당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 대안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를 활용하는 게 맞다. 다만 국민회의의 의사결정에 민주당이 직접 참여하는 건 옳지 않고 서로 협의하는 관계 정도가 좋지 않을까 한다.
어쨌건 이런 일이 이뤄지려면 기성 정당에 대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압박이 필요하다. 몇몇 명망가나 단체가 나서는 게 아니라 국민적·대중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촛불광장에서 만들어졌던 정도의 여론의 크기와 무게를 어떻게 다시 한 번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야 정당에 끌려다니지 않고 시민사회를 중심에 두고 현실정치 세력을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그게 국민회의의 역할이다.”
계몽 지양하고 대중성 강화해야

그러기엔 시민운동 역시 위기다. 촛불시민들조차 시민단체를 또 다른 권력기관으로 봤고, 최근에는 환경운동연합의 회계 부정 사건까지 터졌다. 시민단체의 ‘스캔들’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경실련 사무총장의 칼럼 대필 사건, 2000년 녹색연합 사무총장의 성추행 사건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시민운동의 ‘성장통’으로 여겨졌다. 고름만 도려내면 괜찮다고 격려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지금은 갱년기 질환에 가깝다. 시민운동 전체가 역동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부패 추문이 불거졌다. 수술도 보통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시민운동가 스스로 토로한다. 정당성과 도덕성이 무너진 시민운동은 전략과 집행력을 잃어버린 정당과 다를 바 없다.

“운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부족했다. 계몽식 소통에 치우쳤다. 예를 들어 촛불정국에서 ‘정권 퇴진’ 구호가 나왔는데, 그게 촛불 현장의 대중에게는 호응받았지만 전체 국민이 보기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었다. 집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선출 권력에 퇴진을 요구하는 건 지나친 것 아니냐, 광우병국민대책회의나 시민단체가 그런 구호를 내걸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느냐 등의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참여연대만 해도 그동안 전문가 운동으로 비춰진 측면이 있다. 앞으로는 대중운동의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운동하면 시민들의 혹독한 불신을 피할 수 없다.
시민운동이 그동안 권력과 자본에 부분적으로 순치된 측면도 있다. ‘거버넌스’(governance)는 필요하다. 열린 공간에서 권력과 소통해야 하니까. 그런데 지난 10년간 아무래도 유리한 환경에서 운동하다 보니 긴장감과 경각심이 떨어진 것 같다. 이게 국민에게는 변명이 안 된다. 우리는 부정부패한 권력을 고발하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관대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부는 이 대목에 대해 앞으로 더 악랄하게 치고 나올 수 있다. 물론 부당한 일이다. 이명박 정권은 시민단체를 부정한다. 뉴라이트 인사들만 대화 상대로 여긴다. 친위 세력을 육성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동안 재정 문제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던 지역 시민단체들은 이 과정에서 더 큰 위협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부당한 의도만 탓할 수는 없다. 냉철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시민운동 냉철한 자기 점검 필요

그래도 박 실장은 비교적 쾌활했다. 낙관의 자세가 있었다. 풀뿌리 수준에서 생활 의제를 중심으로 펼친 지난 10여 년의 성과 위에 한국 사회 전체를 고민하는 시야를 덧붙이는 데서 시민운동의 새로운 모색이 가능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기계적 중립성을 떨치고 상상력을 발휘해 선거 국면에서 더 자유롭고 넓게 역할하는” 2010년의 기획도 거듭 강조했다. 전체를 보는 시각을 중시하는 그는 100여만원의 활동비와 보수 언론의 딴죽과 당국의 탄압 정도에 주눅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11월5일 새벽의 체포로 130여 일에 걸친 그의 수배 생활도 끝났다. 조계사 농성 시절, 그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 전자우편 주소를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한테 위문 메일이라도 보내려나 했다. 알고 보니 인터넷 게임 사이트 로그인에 필요하단다. 그런데 조계사에서 나온 뒤 아들이 조금 변했다. “아빠하고 이렇게 통화해도 괜찮은 거예요?” 10살짜리 아들은 지난 석 달 사이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눈치채버렸다. 어린 날의 슬픈 추억 하나를 간직하게 될 아들은 삼겹살을 좋아하는 아빠의 얼굴을 이제 구치소에 가야 볼 수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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