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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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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의 연애편지

등록 2008-03-27 15:00 수정 2020-05-02 19:25

▣ 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piao@hani.co.kr

1.
‘그’가 그리웠다. 10년 동안. 1998년 봄, 기자로 왔을 때 ‘그’의 앞에 처음 선 서른 즈음 총각은 발그레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2.
그해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벚꽃을 하얗게 흩어놓던 바람은 5년차 기자의 갈망도 흔들어 깨웠다. 지긋지긋했던 권위주의 시대를 밀어낼, 더 나은 세상의 낌새에 배가 고팠다.
먼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을 짓뭉갰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관련자들에게 달려갔다. 그에게 유죄의 굴레를 씌웠던 판검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답답한 학교와 가난이 싫어 동반 투신자살한 네 여중생의 영혼을 만나러 대학로 밤거리로 나갔다.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속도’로 달리고 나면 가슴이 좀 시원해진다는 여중생 꼭지(당시 16살·가명)는 폭주족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만난 젊은 노숙인에겐 “일자리를 구하러 바닷가로 갈 차비” 몇만원을 건넸다. 외환위기인데도 재벌들은 외화를 빼돌려 국외에서 호화 생활을 하다 적발됐고, 수배 노동자는 서울의 어떤 골목길 반지하방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귀여웠던 나임(당시 3살)은 지금 어디 있을까. 엄마는 한국 사람인데도 파키스탄인 아빠를 따라 이 땅에서 쫓겨나야 했던 나임.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40대 가장은 “원조교제에 나서는 딸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만주에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대구 출신 조윤옥 할머니는 해방 뒤 북한 국적으로 등록됐다는 이유만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옌볜에서 두 동생과 58년 만에 해후하는 모습은 카메라마저 눈물 흘리게 했다. 세계인권선언 50돌이던 그해, 장기수들의 사상의 자유는 감옥 속에서만 허용됐고, 영남위원회라는 공안사건이 세밑을 스산하게 장식했다.
세상은 변할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서른 즈음의 사랑은 이뤄질 것 같으면서도 이뤄지지 않았다. 실연에 빠질수록 ‘그’에 대한 열정만 뜨거워졌을 뿐.
3.
2008년, 10년을 돌고 돌아 다시 에서 맞는 봄. 또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고, 승리자들은 지난 세월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그’를 떠나 있던 시간이니 내게는 분명 상실의 세월일 수도 있겠으나, 저들이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 파란 새싹처럼 궁금증이 솟는다. 권력에 배고팠다고 하면서도 뱃속엔 땅뙈기니 오피스텔이니 잔뜩 비곗덩어리를 숨기고 있다 들켜버린 내장비만 환자들이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지난 10년 사이 정말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들은 따로 있다. 눈망울이 커다란, 러블린이라는 예쁜 이름의 나이지리아 소녀는 아빠와 함께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한다. 10년 전 서울에서 태어났고 김치만으로 밥 한 공기를 먹어치우는 러블린을 대한민국은 여전히 품어주지 못한다. 전국 단위 일제고사가 초·중학교에까지 부활하고, 14살 중학생은 “제발, 학원이 없어지게 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랜드노조 부위원장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노동자들은 구제금융 상황으로 돌아갈 것 같아 불안하다”고 호소했고, 어떤 골목길 반지하방에서는 비정규직 삶에 지친 아줌마 노동자가 수면제로 생을 마감했다. 조윤옥 할머니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끝내 바스러진 유골로 고향 땅을 밟았다. 성폭행당한 여고생(17)은 화장실에서 홀로 아이를 낳아 버릴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고, 끔찍한 어린이 살해 사건이 반복돼도 어린이들은 여전히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 세계인권선언 60돌인 올해, 10년 수배 끝에 붙잡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는 3살·4살 두 딸과 생이별했다. 강기훈씨는 이제야 필적감정 결과가 뒤집혀 무죄가 입증됐으나, 재심이란 절차가 또 그를 기다린다. 판검사들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 판검사보다 높은 곳에는 재벌이 있으니, 10년 전처럼 외화 밀반출 같은 ‘사소한’ 혐의로는 결코 처벌되지 않을 기세다.
세상은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그리움은 세월을 먹고 자랐다.
4.
마흔 즈음의 애아빠가 돼 다시 ‘그’ 앞에 섰는데도, 심장은 방망이질하고 펜 끝은 달빛 아래 수줍은 개나리 가지처럼 떨린다. 다행히, 희망의 낌새를 찾는 습관은 여전하다. 이제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매주 두꺼운 연서를 보내기로 한다. 지난 1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오히려 세련되어져 더 잔혹하고 은밀해져 더 야비한 세상의 모습을 거기 담으려 한다. 그건 아귀다툼 지옥과 연옥의 묘사처럼 읽기 불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그랬듯, 그것은 지독한 사랑의 발로. ‘그’와 다시 손잡고 찾아가고픈 봄날 정원 같은 세상을 그리기 위함이다.
세상은 진보한다고 믿는 ‘그’, 연대의 손을 기꺼이 내미는 ‘그’, 적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그’, 을 손에 든 ‘그’.
그에게 여기 연애편지 첫 권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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