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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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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전쟁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규항 발행인

영화 만드는 박찬욱씨가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한참 이 사람 저 사람 그 글을 화제로 올리기에 부러 찾아 읽었었다. 기억에 기대어 내용을 적어보면 이렇다. 박찬욱씨가 젊은 상류계급 인사들의 무슨 모임에 불려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하더란다. 그런데 그게 겉치레로서가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인간적인 호감을 뿌리치기가 어렵더라는 것이다.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그로선 거부감이 들지도 느끼하지도 않는 ‘새로운 반동들’(이건 내 표현)이 적이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부르주아 1세대의 험한 외양

알다시피 한국의 부르주아 1세대는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본디 어느 모로 보나 착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제 집에서 소를 훔쳐 도망나온 사람이었으며, 동족이 죽어나가는 전장을 쫓아다니며 탄피를 팔아먹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돈에 대한 타고난 탐욕과 하한선이 없는 듯한 인격을 한껏 발휘하여 개발독재 시기에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험한 외양까지 바꾸어낼 순 없었다. 그들은 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그들 앞에 조아리게 했지만 조아린 사람들은 내심 그들에게 침을 뱉고 있었다.

양반이 되기 위해 족보를 사들이던 상놈처럼, 그들은 돈으로 제 가계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집안 좋고 머리 좋은 배우자와 짝을 지워 좀더 우량한 아이를 만들어내고, 정히 엇나가는 아이는 미국대학에 기부입학이라도 시켜 통속적인 외양을 확보하기를 수십 년, 드디어 그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을 얻게 되었다. 이른바 재벌 3세, 혹은 4세로 불리는 그 아이들은 대개(물론 전부는 아니다) 인물 좋고 머리도 좋으며 심지어 예의 바르고 착하다.

물론 그건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그들의 진짜 인격은 아니다. ‘이젠 부자가 착하기까지 하다’라는 말의 실체는 ‘이젠 부자가 착함까지 사들였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부를 일구고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의 시궁창을 천하게 구르던 제 할아버지와는 달리 일 년 내내 착한 얼굴을 하면서도 제 부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착한 것이다. 단언컨대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제 부에 결정적인 위협을 받을 때 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은 없다.

편집장 조중사의 아내는 오랫동안 남산 중턱에 있는 부잣집 아이들만 다닌다는 사립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지난해 거길 그만두고 성북구의 한 가난한 동네 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런데 그곳으로 옮기고는 퇴근만 하면 우울해하고 술이라도 한잔할라치면 어김없이 눈물을 보인다고 했다. 조중사가 연유를 물으니 그러더란다. “아이들이 격차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여기 학교 아이들은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를 빼곤 지난번 학교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축에 껴. 거기에다 왜 여기 아이들은 키도 덩치도 작고, 또 왜 이리 아픈 아이들은 많은지….”

품위마저 사들인 부자들

개혁파든 극우파든 신자유주의 광신도들의 지배가 지속되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힘겨워지는 현실 또한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연대하고 싸우고 있고 또 싸워야 한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의 품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가난은 수치스러운 것인가? 아니다. 가난은 불편하고 때론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적어도 부유보다는 정당하고 품위 있는 삶의 방식이다.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이는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품위마저 사들인 부자들은 세상에서 가난의 품위라는 것을 도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바야흐로 품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질 때, 그래서 아이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제 아비 어미를 수치스러워하게 될 때 우리 삶도 끝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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