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차별 딛고 세상 속으로!

등록 2001-02-28 00:00 수정 2020-05-03 04:21

HIV 감염인의 ‘사회적 생명’을 지키는 러브포원 사이트와 자활모임 K+센터

“미래님 어서오세요.” “광서씨 반가워요.”

2월23일 저녁 7시 광화문의 한 한정식집에는 속속 사람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머리가 허연 60대 노인과 귀걸이를 한 10대 청소년, 보건소 공무원과 인터넷 업체 직원. 좀체 어울리기 힘들 듯한 열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조촐한 밥상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이날은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러브포원’(www.love4one.com)이 정기모임을 갖는 날. 지난 10월부터 시작된 이들의 모임은 벌써 네 번째다. 이들 속에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에이즈를 발병시키는 바이러스) 감염인과 사이트 운영을 도와주는 비감염인이 차별없이 섞여 있었다.

위안과 희망을 나누는 사이트

“소식지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 아시죠? 아직 글을 안 주신 분들은 빨리 써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엔 야유회를 갈 계획입니다….”

‘러브포원’ 운영자인 박광서(30)씨가 간단한 사업보고를 끝내자 참석자들은 삼삼오오로 얘기를 나누었다. 연신 자리를 바꿔가며 이어진 저녁 모임은 저녁 9시가 넘어 끝났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2000년 연말까지 발생한 HIV 감염인/에이즈 환자의 수는 총 1280명. 85년 첫 감염인이 발생한 이래 이들은 언제나 숫자의 그늘에 감춰진 이름없는 존재였다. 아직 외국처럼 HIV 감염인임을 밝히고 나서는 단계는 아니지만, ‘러브포원’과 감염인 자활모임인 K+(케이플러스)센터를 통해 서서히 감염인들의 목소리는 세상 속으로 들려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오픈한 ‘러브포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HIV 감염인 사이트다. 한국에이즈예방협회나 에이즈퇴치연맹 등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에이즈 관련 사이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HIV 감염인이 주체가 돼 감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러브포원’ 운영자 박광서씨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국제에이즈회의에 참석한 것이 사이트 개설의 계기가 되었다.

“남아공의 11살짜리 감염인 소년이 개막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타이도 17살 청소년이 감염인 대표로 왔고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박씨는 귀국하자마자 사이트 개설을 서둘렀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 10월에 ‘러브포원’을 개설했고 변변한 홍보 한번 한 적 없지만 문을 연 지 석달 만에 방문 횟수가 5만3천건을 넘겼다. ‘러브포원’은 이메일을 통한 상담뿐 아니라 감염인들이 언제든 들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채팅창을 열어놓고 있다. 채팅창에는 매일 밤마다 항상 10여명 이상이 북적인다. 강원도에 사는 감염인 김정현(35·가명)씨는 “러브포원에 들어와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러브포원은 앞으로 소식지 발간, 사무실 개설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러브포원’이 문을 연 지 두달이 지난 12월에는 HIV 감염인들의 자활공동체 K+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 센터는 한국에이즈퇴치연맹 부설 감염인정보쉼터가 이름을 바꾸면서 감염인 자활활동을 본격화한 것이다. K+란 이름은 ‘한국(Korea)의 HIV 양성(+)반응자’란 뜻을 담고 있다. K+센터는 지난해부터 HIV 감염인 초기 상담활동과 에이즈 환자 간병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www.k-pluss.com)도 운영하고 있다.

간병인이 된 감염인들

K+센터가 지난 한해 동안 펼친 초기 상담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전국 각 보건소를 통해 소개받은 신규 감염인 130여명이 K+에서 상담을 받은 것이다. K+센터 김지운 대표는 “대부분의 감염자들은 감염사실을 알고나서 심한 방황을 겪는다”며 “초기 3개월 동안의 상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HIV 감염인들의 ‘동료상담’을 통해 방황하는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효과적이란 얘기다. K+센터도 ‘러브포원’처럼 매달 15∼20명이 참여하는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대학로 한 호프집에서 사랑의 나눔 축제를 성황리에 벌이기도 했다.

초기 상담활동과 더불어 K+센터는 에이즈 말기환자 간병활동도 해오고 있다. 지난해 이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병인 교육을 받은 사람은 총 60여명. 이중 절반가량이 감염인이었다. 감염인이 스스로 감염인을 돕는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K+센터 김도훈(32·가명) 상담부장은 감염인이 간병활동을 하게 되면 두 가지 효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우선 에이즈 말기 환자를 돌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건강관리를 좀더 철저히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사회에 뭔가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돼 상처난 자긍심을 조금은 회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HIV 감염인들의 모임이 시작되고, 감염인의 인권을 찾으려는 노력이 서서히 일고 있지만, 여전히 남은 문제들은 많다. 우선 감염자의 생계대책이 시급하다. 감염자들 중 상당수는 감염사실 때문에 방황을 하다 실직을 하거나 가족과 멀어지게 된다. 사실상 사회생활을 못하게 돼 생활비 조달조차 어려워지는 것이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이들에게 약값의 반을 선불해야 하는 현 제도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여전한 병원의 홀대도 문제다. 아직도 “에이즈 환자”라고 하면 진료태도가 달라지거나 심지어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에이즈 치료기관으로 유명한 서울의 한 병원에 감염자가 약 부작용으로 요로결석이 생겨 새벽에 응급실로 갔으나, 담당의사가 없다며 치료를 거부해 발길을 돌린 사례가 있었다. 최근에 줄어들기는 했지만, 보건소 직원의 부주의로 감염사실이 본인의 동의없이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알려지는 경우가 적지않다. 이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7조의 비밀누설금지조항에 어긋나는 행위다.

당장 코앞에 닥친 에이즈 재원 부족 문제도 있다. 비록 후불제이기는 하지만 정부는 그동안 HIV 감염인들의 약값을 전액 지원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219명 등 해마다 감염인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부예산은 그대로여서 이마저 위험한 상태다. 올해 예산은 지난해와 같은 15억원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에도 11월에 진료비 예산이 바닥났다”며 “그나마 HIV 검사비 등 다른 예산을 끌어쓴 것”이라고 말한다. “올해는 상반기만 지나면 예산이 바닥날 것”이란 게 그의 우려다. 감염자들을 에이즈 정책에서 배제하는 정부 방침도 문제다. 일례로 K+센터는 지난해 정부 주최의 에이즈관련 워크숍에 토론자로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다.

“올해 예산은 상반기면 바닥날 것”

이에 반해 서구에선 에이즈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 중 상당수가 HIV 감염자일 정도로 에이즈 정책에 감염인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K+센터 김도훈 상담부장은 “우리나라 에이즈 관리정책의 목적은 대국민 예방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HIV 감염인의 복지”라며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예방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예방을 위해 감염인을 관리하려 들수록 오히려 숨어든다는 지적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정책의 기조가 에이즈의 예방과 확산억제에 중점을 두는 ‘에이즈 없는 세상’에서, 감염인의 복지에 중점을 두는 ‘에이즈와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규정해 혜택을 주는 나라도 여럿 있다. 감염인을 사회 속으로 끌어안을 때 에이즈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는 ‘HIV 감염자와 에이즈 환자의 인권’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에이즈 문제를 잘못 다루는 경우, 에이즈 환자는 생물학적 죽음에 앞서 이미 사회적으로 사망하게 될 수도 있다.” 사회적 생명을 되찾으려는 HIV 감염인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