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머리를 찧어대는 느낌부터 시작된 당황스러운 하룻밤… 카드 조회로 모텔 간 젊은이들 색출하니 특수절도 위에 혐의 겹겹
▣ 이순혁 기자/ 한겨레 법조팀 hyuk@hani.co.kr
기억이 희미하다. 누군가 내 머리를 어딘가에 찧어대는 느낌. 귀찮다. ‘누가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굴지. 난 쉬고 싶을 뿐인데….’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대로변 화단. ‘헉…. 여기가 어디지?’ 건너편 미라보 호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 신촌기차역 근처. ‘아, 어제 술자리가 신촌에서 있었지.’ 일어서면서 주머니를 더듬는데, 있어야 할 휴대전화가 없다. 뒷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도 마찬가지. “아차, 당했구나!”
다행히 지구대가 근처에 있었다. 지갑과 휴대전화 분실신고서를 작성하고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분실신고를 했다. 실감이 안 났다.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는데,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오른쪽 이마엔 생채기들이 여럿 보였다. 뭔가에 긁혀서 피부가 벗겨졌다. 쓰라렸다.
술자리 뒤 사고, 부끄럽고 열받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전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서울중앙지검에서 황우석 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다. 온종일 바쁘게 기사를 처리했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소폭’(소주폭탄)이 돌았다. 같은 팀 선배 한 명과 근처 카페로 2차를 갔다. 이번에도 역시 폭탄주가 얼추 10잔을 훌쩍 넘어섰다. 호기롭게 술값도 계산했다.

3차는 신촌. 팀 선배가 아는 친구의 길거리 포장마차 술자리에 동석해 소주를 마셨다. 이어 맥줏집으로 4차. 그 뒤론 기억이 희미했다. 술자리에서 ‘집에 좀 들어가라’는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이유 없이 화를 낸 기억도 떠올랐다. 정황상 4차에서 나와 미라보 호텔 건너편인 노고산동 집 쪽으로 걸어가다 ‘사고’가 난 듯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지구대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사고’가 실감이 안 났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부끄러웠다. 분노가 일었다. ‘어떤 놈들인지 잡기만 하면 내 골로 보내주마!!’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용카드사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밤사이 카드가 사용된 곳이 있는지 물었다. 약 1시간 전 한 술집과 모텔에서 카드가 결제됐다는 답을 들었다. 귀가 번쩍 틔었다. ‘모텔? 너, 딱 걸렸어.’
지구대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모텔. 주인은 1시간 전 8만원을 결제하고 방 2개를 잡아 투숙한 두 쌍의 남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모텔 주위를 둘러싼 뒤 초인종을 눌렀다. 고개를 푹 숙인 투숙객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절도 및 상해 혐의로 긴급 체포됐습니다. 불리한 진술은 안 할 권리가 있으며….” 한눈에 봐도 철없어 보이는 20대 초반. 수갑이 채워지는 모습을 보는데, 뜻밖에 끓어오르는 분노 대신에 ‘새파란 인생에 벌써부터 빨간 줄이니…’ 하는 동정심이 솟았다.
84년생인 강아무개와 김아무개는 몇 달 전 제대한 친구 사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강과 달리 김은 할 말 없다는 듯 새침한 표정. 김은 절도 혐의로 기소유예 전과가 있었다. 가방에서 내 지갑과 휴대전화가 나왔다.
강·김은 취객이 자기 쪽으로 쓰러져 주머니에서 지갑 등을 빼냈을 뿐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카드를 훔쳐 나이트클럽에서 화대 36만원과 모텔 투숙비를 계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로 떨어뜨려놓고 “저 친구가 다 말했어. 너도 다 부는 게 좋아”라며 구슬리기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강·김에게는 특수절도 외에도 다른 혐의가 여럿 적용됐다. 남의 카드를 사용해 사기 및 여신금융업법 위반에 성매매특별법까지.
이들의 진술을 들은 경찰관이 내게 “이들로부터 폭행당한 기억이 있냐”고 물어왔다. 동정심 때문인지, “누군가 내 머리를 어딘가에 찧어댄 기억만 있을 뿐 누군지 보지는 못해 이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어느새 날이 뿌옇게 밝아왔다. 지구대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김과 함께 투숙했던 성매매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쁜 사람들인지도 몰랐어요. 저는 돌려보내주면 안 되나요?” 몇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몇 년생입니까?” “70년….” “가정은?” “….”(끄덕끄덕) 가족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갑자기 지구대가 소란스러워졌다. 강·김에게 성매매 여성을 맺어준(!) 나이트클럽의 관계자였다. “아, 지구대가 업소를 다 죽인다. 그래 죽자 죽어.” “경찰이면 다야? 밀치지 마, 다 고소할 거야.” 그의 으름장에 지구대가 쩌렁쩌렁 울렸다. 성매매 알선 사실이 드러나면 나이트클럽이 영업정지 등 제재를 받게 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구의 이 남성은 경찰관들과의 대화 틈틈이 강과 김, 여성 쪽으로 접근해 “우리를 통해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마”라며 속삭였다. 사고의 파장이 나이트클럽 영업정지까지 미친 것이다.
나이트클럽 ‘어깨’의 경찰서 소동
아침 8시께 강·김과 함께 경찰서로 옮겨졌다. 6년 전 수습기자 시절 처음 한 달 동안 숙식을 해결하며 거주했던 서대문경찰서. 한때는 어깨 펴고 드나들던 출입처여서일까, 피해자로 찾은 경찰서가 더욱 어색했다. 경찰서 계단을 오르는데, 출입할 때 안면이 있는 한 형사반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여기 출입했던…. 맞지? 아침부터 웬일이야?”
민망한 시선들 속에서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지갑은 돌려받았지만, 그 속에 있던 10여만원은 이미 강·김이 다 써버렸다. 담당 형사가 “차비 하세요”라며 1만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아닙니다. 3천원만 주세요. 집이 가까워 그 정도면 충분해요.”
3천원을 움켜쥐고 형사계를 나서는데, 친하게 지냈던 ‘형님’(기자는 대개 경찰을 형님이라고 부른다)이 생각났다. 그 형님이 근무하던 사고조사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아냐?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얼굴은 또 왜 그래?” 몇 년 만에 찾아온 출입기자를 알아본 형님은 내 손을 잡더니 약국으로 이끌었다. “여기 술약이랑 연고 좀 주세요.”
그러고 보니 속도 쓰렸다. 얼마나 마셨던 것일까. “다음에는 저녁 때 술이나 한잔하러 와. 아니 술 대신 밥! 허허. 이젠 나이도 있는데 조심히 살고.” 배웅을 받으며 경찰서를 나섰다. 화창한 토요일 오전의 길거리. 오늘따라 모든 행인들이 깔끔하고 정갈해 보였다. 오직 나만이 후줄근하고 처량한 이 느낌. ‘꼴이 이게 뭔가….’ 쓰라린 후회를 곱씹으며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P.S. 사고 이틀 뒤 경찰청에 근무하는 한 간부로부터 문자 메시지도 받았다. “이 기자! 술 좀 적당히 마셔. 지갑 잃어버리지 말고. 고놈들 참, 기자 지갑을 노리다니. 함 봐.”
강·김은 이틀 뒤 서울서부지법 영장실질심사에서 영장이 기각돼 석방됐다. 며칠 뒤 김의 아버지가 강·김과 함께 출입처인 서울중앙지검에 찾아왔다. “지난해 11월 애엄마가 죽고, 이제 가족은 이 아들 하나뿐인데…”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손해 본 금액만 변상받고 합의서를 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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