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동 가운데 단 하나 남았던 남산 기슭의 회현 제2시민아파트 역사 속으로
판잣집 사람들의 청춘과 회한, 와우아파트 붕괴의 악몽을 묻고 쓸쓸한 퇴장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김정옥(87) 할머니의 집은 서울 회현 제2시민아파트 614호다. 그는 “우리가 마지막 시민아파트 주민”이라며 웃었다. 황해도 안악이 고향인 할머니는 “‘해방되던 이듬해 음력 5월’에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우린 천주교인이었는데, ‘빨갱이’들은 천주교를 싫어하잖아.” 서울에 마땅히 기댈 언덕이 없던 할머니네 가족은 자연스럽게 남산 중턱에 자리한 판자촌 주민이 됐다. 1970년 아파트에 들어올 때, 입주금은 150만원. 할머니는 “은행에서 20만원을 융자받아 한달에 2천원씩 갚아나갔다”며 “새집에 들어올 때 떳떳한 ‘시민’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349동이나 보수가 필요했던 시절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시민아파트는 한때 세운상가·청계고가·삼일빌딩과 더불어 박정희 근대화를 상징하는 기념물이었다. 그 때문일까. ‘시민아파트’라는 이름에선 묘한 근대화의 냄새가 난다. 전쟁이 끝나고 갈 곳을 잃어버린 피난민들은 서울 사대문 주변의 산등성이를 찾아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신이상이 된 어머니와 강도질로 경찰에 잡혀간 남동생과 양공주가 되어버린 여동생과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내의 주검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치통을 견뎌내며 근대화를 이뤄냈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의 고향은 이곳 해방촌이다. 1966년 서울시가 벌인 전수조사 결과를 보면, 서울에는 무려 13만6650동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60년대 서울에는 13만6650명의 ‘철호’들이 오발탄처럼 밤거리를 떠돌았을 것이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대통령과 서울시장은 그들에게 아파트를 한 채씩 지어줘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무렵 서울시장이었던 ‘원조 불도저’ 김현옥씨는 13만6650동 가운데 5만6650동은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현지 개량하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아파트를 지어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를 만들어 이주·정착시키기로 했다. 그는 1968년 6월18일 ‘금화아파트’를 시작으로 3년 동안 서울 32개 지구에 무려 434동, 1만7365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그러하되, 그렇게 이룩한 근대화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1970년 4월8일 새벽 6시20분 서울 마포구 창천동 산2 일대 아파트 한 동(와우아파트)이 무너져 33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공사비를 떼먹고 무면허 업자에게 공사를 맡긴 마포구청장·건축과장·담당자·시공업자 등이 구속됐다. 아파트는 곧 부정해야 할 ‘과거’가 됐다. 서울시가 ‘시민아파트 안전진단반’을 만들어 아파트의 안전도를 검사한 결과, 그때까지 완공된 아파트 405동 가운데 86.1%인 349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고가 난지 사흘 뒤인 70년 4월11일 오후 YMCA에서 잡지 <기독교 사상>의 주간으로 일하던 박형규 목사는 “숫자만 늘리면 칭찬받은 종적 권력구조, 돈이면 제일이라는 업자들의 사고방식이 얽혀 이런 일이 터졌다”며 “와우식 근대화가 지속된다면 우리 모두 죽게 되는 결과가 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식 난방아파트
이후 서울시 주택과는 꾸준히 아파트를 부수기 시작했다. 언론에 ‘마지막 시민아파트’로 이름이 오르내린 서울 종로구 창신·숭인 삼일아파트(7층)는 “임대아파트를 달라”는 세입자들과의 싸움을 끝내고 한창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시는 주거 공간인 3~7층만 철거하고, 상가인 1·2층은 그대로 남겨둘 계획이다. 지난해 철거된 중구 삼일아파트 뒤편에는 2007년 말까지 지하 4층, 지상 34층으로 지어지는 롯데캐슬 5개 동이 회색 콘크리트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시민아파트 434동 가운데 남은 것은 남산 기슭의 회현 제2시민아파트 딱 1동뿐이다.
김씨 할머니의 일생은 가난 속에서 허덕였던 피난민들의 삶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17년 전에 세수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고, 남편은 54살 때 “기침을 많이 해서 죽었다”고 말했다. 그게 벌써 38년 전이다. 그 병이 결핵인지 아니면 다른 병인지 이제 와서 확인할 도리는 없다. “돈이 없어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재미있는 옛 이야기를 꺼내듯 차라리 웃고 있었다.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밥장사도 하고 노점상도 해서 벌어먹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방 하나를 세내어 받는 15만원으로 생계를 꾸린다.
회현 시민아파트 수위 홍하표(70)씨는 아파트에 청춘을 묻었다. 그는 353가구 전부의 젓가락 수까지 세는 아파트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1970년 완공 이후 지금까지 수위 일을 맡아봤다”고 말했다. 애초 14명이었던 수위는 퇴직금 문제 때문에 하나둘씩 잘려나가 이제 5명이 남았다. 홍씨는 “시민아파트가 부실한 것 같지만, 여기는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다음에 완공돼서 튼튼하다”고 말했다. 주민 김경미(39)씨는 “옛날에는 벽에 못도 제대로 안 들어간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아파트는 철거민들을 위해 지어졌지만, 대부분의 남산골 철거민들은 집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틈을 파고든 사람이 연예인, 공무원, 정·재계 인사들이었다. “이 아파트가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난방식 아파트였거든요. 그때만 해도 이런 아파트가 없었어요. 인기 좋았죠.” 홍씨가 말했다. 아파트는 실평수가 11.6평에 불과하지만, 방이 3개나 나오고 당시로선 최신식 시설이었던 수세식 화장실과 작은 나무마루도 갖춰져 있다.
이곳을 거쳐간 유명인들로는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불후의 명곡 <아파트>로 한 세대를 풍미한 가수 윤수일, 반공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던 선 굵은 배우 문호장,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은방울 자매 등이 있다. 마을 주민 김세진(61)씨는 “남산 안기부와 옛날 KBS(현 남산 애니메이션센터) 자리가 가까워 안기부 직원들과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친절한 금자씨>도 신세를 지다
그렇지만 아파트도 내년이면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아파트의 골조는 튼튼하지만, 이를 떠받치는 옹벽이 안전진단에서 D급 판정을 받았다. 주민들은 지난 7월18일 중구 쪽에 “아파트 정리를 해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김세진씨는 “시의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면 내년부터 철거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찍는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풍경을 담기 위해 종종 아파트를 찾는다. 최근 영화 <주먹이 운다>와 <친절한 금자씨>도 회현 시민아파트의 신세를 졌다. 서울시 주택과의 ‘시민아파트 정리 현황’을 보면, 1970년 지어진 회현동 1가 147-23 일대의 시민아파트를 “2006년 정리대상”이로 꼽고 있다. 시민아파트는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아파트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도 저무는 것이죠. 왜 시원섭섭하지 않겠어요. 35년을 한결같이 드나들던 곳인데.” 홍씨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의 수많은 잘못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라지는 것은 뭐든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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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을대표 김세진씨]
엘리베이터 없는 10층 건물… 요즘엔 뮤직비디어 찍으러 많이 와
회현 시민아파트 주민 김세진(61)씨의 직함은 ‘회현 제2시민아파트 정리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시민아파트는 주민들의 사유재산이지만, 애초 아파트를 부실시공한 서울시가 책임을 지고 철거 업무를 도맡아왔다. 김씨는 “건물이 낡고 불편해 곧 철거해야겠다는 주민 의견서를 지난 7월에 제출했다”며 “내년부터 철거 공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파트의 역사는.
=아파트는 1970년에 김현옥 서울시장이 만들었다. 내가 이사온 게 1973년쯤이다. 부실하게 시공된 다른 아파트와 달리 우리 아파트는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뒤 만들어져 튼튼한 편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판자촌들을 허물고, 거기 살던 사람들에게 입주권을 줬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신 시설인데다, 교통도 편리해 유명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 처음부터 살던 주민들이 아직 몇 남아 있다. 지금 33살짜리 딸이 1살 때 이사왔다. 이 집에서 딸 넷을 키웠는데, 시집은 아직 하나밖에 못 보냈다. 걱정이다. 10층 건물이지만, 엘리베이터는 없다. (웃음)
아파트가 철거되면 주민들은 어디로 가나.
=집주인과 세입자가 다르다. 현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입자다. 집주인들은 아파트를 서울시에 판 뒤, SH공사(옛 서울시 도시개발공사)가 만드는 33평짜리 아파트 입주권을 받는다. 세입자들은 3개월치 생활비로 계산된 주거이전비나 공공임대 아파트 입주권을 받는다고 들었다. 주민 대부분에게 동의서를 받았다. 90%쯤 끝났다. 아파트가 철거되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 같다. 시골 마을같이 주민들 사이가 좋은데 아쉽다.
아파트에 얽힌 추억은.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서청원 전 의원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 여기 살았다. 그 부인이 주민자치회 부회장을 했다. 나중에 보니, 한나라당 대표도 하고 출세했더라. 얼마 전에 <주먹이 운다> 영화 촬영 때 최민식씨를 봤는데, 실제 영화는 보지 못했다.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많이 아파트를 찾는데,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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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서울 종로구 내자동 75 일대에 있던 미쿠니아파트다. 이 아파트를 만든 것은 중국, 일본에 석유를 수출하던 미쿠니상회로 1935년에 4층(연건평 635평)과 3층(199평)짜리 건물 2동으로 지었다. 해방 뒤에는 내자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미군 숙소로 사용됐고, 1960년대 말에 한국인이 인수해 호텔로 사용하다가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철거됐다.
광복 이후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 성북구 종암동에 세워진 종암아파트다. 한 가구당 크기는 17.3평(공용면적 포함)이었고, 4층짜리 건물 4동에 모두 152가구가 지어졌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를 연 것은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만든 마포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애초 중산층 이상 시민들이 들어와 살 수 있게 10층 정도의 고층으로 지으려 했지만,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의 반대로 6층(6동 350가구)으로 낮아졌다. 이때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그럼 김장독은 어디에다 묻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1968년 동부이촌동에 공무원 아파트 단지, 1970년 한강맨션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서며 아파트는 부유층이 사는 고급 주택 단지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여의도 윤중제와 강남개발이 이뤄지며 수없이 많은 아파트가 지어져, 우리나라는 하루아침에 아파트 왕국이 됐다. 서울 은마아파트 등 그때 지은 아파트들의 재건축 시점이 돌아와 2003년 이후 나라 전체가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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