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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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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없는 노래여

등록 2000-11-15 15:00 수정 2020-05-02 19:21

‘대박’ 터트릴 날 꿈꾸며 방송사 순례… 설자리 점차 좁아지는 밤무대 무명 가수들의 팍팍한 삶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자 홀 안에 갇혀 떠돌던 음악이 왈칵 밖으로 밀려나왔다. 색소폰을 타고 흐르는 음악은 ‘트로트’였다. 잠시 뒤, 어두운 불빛 아래 무대 뒤편에서 말쑥하게 맵시를 낸 가수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엷은 갈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그가 마이크를 뽑아들었다.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그까짓 것 사랑때문에…’

그가 ‘나훈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곧바로 ‘남진’으로 이어졌다. 한곡이 끝나기 무섭게 반주가 시작되면 거기에 맞춰 노래가 또 이어졌다. 홀 한쪽에서 잠깐 박수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3곡을 부른 그는 어느새 무대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나 곡목을 소개하는 멘트는 끝내 없었다. 그는 그저 이름없는 한명의 가수일 뿐이었다.

우리는 ‘가수 독립군’

11월9일 밤 9시, 경기도 성남시 하와이카바레에 선 가수 태민(46·본명 이재석)씨의 무대는 이렇게 짧게 끝났다. 나이 사십을 이미 훌쩍 넘긴 그의 연예인 생활은 올해로 24년째에 접어든다. 가수 배철수를 닮은 외모에 착안해 한때 노철수라는 이름으로 밤무대 MC 생활을 하던 그는 80년대 초 자신이 일하던 업소에 온 나훈아를 보고 가수 태민으로 변신했다.

경북 영주와 충남 논산 등지를 떠돌며 밤무대를 전전하던 그는 지난 91년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밤무대 무명 가수의 삶은 계속 이어졌다.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채 한손에는 가방을 들고 전철을 타고 업소를 다니다보면 ‘노가다를 하면 했지 이렇게 노래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하룻밤에 몇번씩 들었습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몇번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명가수다. 지난 96년 사비를 털어 늦깎이로 낸 이란 첫 앨범을 시작으로 그동안 음반도 3개를 냈다.

요즘 그가 하룻밤에 뛰는 업소는 세곳이다. 잠실에 있는 성인클럽을 거쳐 성남으로 내려온 그는 이제 신림동 업소로 가야 한다. 한때 잘 나갈 때는 밤을 새우다시피해가며 하룻밤에 12군데를 뛰기도 했다. 나름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는데다 뛸 업소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는 명절 때만 빼고 매일같이 여의도 방송가를 찾는다. 방송사 음악 담당 프로듀서들에게 얼굴을 알려 한번이라도 더 전파를 타려는 것이다. “동생 같은 프로듀서들에게 도와달라고 수백번 부탁합니다. 어떤 때는 손목을 잡고 아예 읍소도 합니다. 그러면 열흘 넘게 지나서 한번 내 노래를 틀어줄까 말까 하죠.” 업소 개런티가 텔레비전 출연빈도에 따라 책정되는 탓도 있지만, 방송사를 드나드는 건 여전히 버릴 수 없는 스타의 꿈 때문이다. ‘이 노래 좋다. 부른 사람이 누구지?’ 하는 대중의 반응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방송을 타고 봐야 한다.

방송사 순례는 밤무대 트로트 무명 가수들의 모임인 ‘홀로서기 가수회’ 회원 13명이 다같이 다닌다. 그는 홀로서기 멤버들을 ‘가수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매니저가 없다보니 운전은 물론 악보도 의상도 자기가 직접 챙겨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이 있어야 매니저도 두고 할 것 아닙니까. 경제적 여건도 안 되고 그러니까 홀로서기 하는 것이죠. 겉으로만 볼 때 내가 좀 멋을 부린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은 엉망진창이죠.”

과거에는 밤무대에서 뜨면 텔레비전 방송으로 픽업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흘러간 옛이야기일 뿐이다. 요즘의 뮤직 스타는 음반 주소비층인 10대와 20대 초반을 겨냥한 매니지먼트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 시스템에서 ‘무명 탈출’은 어쩌면 ‘신화’에 불과하다. 이름을 얻으려 애쓰는 자체가 허망한 노릇이다.

대박은 복권당첨?

그러나 화려한 무대를 향한 태민씨의 꿈은 나이를 잊고 있다. “나만 믿고 살아온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꼭 떠야 합니다. 어느 ‘순간’을 보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노래에 속고 돈에 울었던 세월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한데 그에게는 오히려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열정은 무턱댄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7월에 나온 3집 가 요즘 한창 뜨기 시작했다며 흐뭇해했다. 문화방송이 최근 드라마 를 방영하면서 자신의 앨범이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트도 마니아가 있습니다. 웬만한 아줌마는 제 노래를 다 알아요. 를 계기로 제 인지도가 높아지면 이제 마지막으로 인생을 걸고 정통가요를 펼쳐보일 작정입니다.” 어릴 적에는 나훈아, 최희준, 서유석 등을 흉내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내 창법은 목에서 소리를 뒤집어 꺾은 뒤 토해내는 나훈아와 분명히 다릅니다. 고유한 창법만이 성공을 보장하죠”라며 개성을 거듭 강조했다.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일대 라이브 카페촌에서 만난 양준석(33)씨는 무명의 설움을 여러 차례 곱씹어야 했다. 등 음반을 3개나 냈지만 다들 빛을 보지 못한 채 실망만 안겨줬기 때문이다. “이제 쉽사리 음반을 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짤막한 대답을 남긴 채 그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다. 저녁 5시가 조금 넘은 라이브 카페에는 아직 이른 탓인지 손님이 10여명에 불과했다. 로부터 시작된 그의 무대는 40여분간 계속됐다. 음악은 다소 무거운 빛깔이었지만 그는 탁트인 음성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고 있었다.

음반을 3개나 낸 그였지만 무대가 끝날 때까지 자기 곡은 단 한곡도 없었다. 남의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자기 곡이 알려지지 않는 한 무명 가수는 결코 뜰 수 없다. 하지만 밤업소는 웬만한 가수가 아니고서는 자기 곡을 부르도록 배려하지 않는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밤무대 가수 중에서 스타가 꽤 나왔어요. 하지만 요즘 밤무대 가수가 떠서 방송에 나간다는 건 복권당첨이나 마찬가지죠. 대표적인 게 김종환씨의 예요. 그야말로 한순간에 대박이 터진 경우죠.” 자기 곡을 부를 수 없다보니 자연히 이들이 스타가 되는 것은, 양씨 말대로 복권당첨일 수밖에 없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알수 없는 또다른 나의 미래∼가.’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또다른 김종환’을 꿈꾸었을까. 낮게 깔리는 미사리의 어둑살처럼 그가 부르는 도 한없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혹시 몇명이라도 팬이 있느냐”는 물음에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하던 그가 통기타와 악보집을 담은 가방을 들쳐메고 다른 업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만성’형 가수는 경쟁력 잃어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에 등록된 전국의 가수는 2천여명. 이들 중 자기 곡이 따로 없는 일반 무대 가수는 60%. 자기 음반이 없어도 가수가 될 수는 있다. 물론 자기 곡이 있다 해도 태민씨처럼 이름을 그다지 얻지 못한 무명 가수가 대부분이지만.

경제불안으로 밤무대 업소가 줄어들고 있는데다 주류 음악이 그룹위주로 대형화하고 춤과 댄스 위주로 가면서 무명 가수들의 설자리는 그만큼 좁아지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90년대 서태지가 등장하고 대번에 스타가 되는 가수들이 나오면서 오랜 무명 시절을 털고 서서히 올라가는 가수들은 경쟁력을 잃게 됐다”며 “무명 가수들을 무조건 옹호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대중음악계는 꼭 텔레비전 방송에 진입하지 않더라도 가수활동을 보완해주는 장치 마련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물론 무명 가수가 다들 ‘열정은 있되 재능이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노래꾼과 춤꾼을 끌어모아 상품성이 있는 뮤직 그룹을 결성하는 데까지 이른 거대 음반기획사들 앞에서 무명 가수들의 꿈은 헛된 그것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게다가 대형 기획사들에 의해 대중의 음악취향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음악현실은 장르별 다양성을 뒤흔들고 결국 무명 가수들의 삶을 더욱 팍팍한 쪽으로 내몰고 있다.

지난 11월8일 밤 10시께 서울시 명동 생음악 클럽 쉘부르. 밤무대 생활 6년째인 김용환(29)씨가 이날 밤 4번째로 무대에 섰다. 물을 가득 채운 컵을 들고 무대 위로 오른 그가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 ‘정태춘’을 부르기 시작했다. 스포트라이트 따위는 없었지만 그의 깊고 그윽한 노래소리가 클럽을 휘감아 돌았다. ‘저 욕망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서정적으로 흐르는 그의 통기타 선율 탓인지 테이블마다 텅 빈 클럽 안이 더욱 황량해보였다. 서너개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도 자기들 이야기에 흠뻑 빠진 채 이따끔씩 이야기가 끊길 때면 김씨를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는 깊어가는 가을밤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씨가 노래 도중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무명의 설움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죠.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재능이 있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방송에서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감추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비집고 나오는 쓸쓸함이 그의 얼굴을 언뜻 스쳐갔다.

매일같이 밤 10시에 쉘부르 무대에 서는 김씨의 출연료는 한달 40만원. 여러 업소를 뛰어야 하지만 예전같지 않다. 명동 쉘부르 정남권 사장은 “2∼3년 전만 해도 좋았는데 IMF 이후 퇴출이다 뭐다 해서 손님도 거의 끊기고 없다. 밤무대에 서다가도 장사가 안 되면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게 무명 가수의 인생이다”고 말했다.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욕망 이전에 ‘먹고사는’ 게 힘든 셈이다. 밤무대 가수생활에서 늘어나는 건 날로 두툼해지는 악보뿐이다. 손님들의 신청곡에 맞추려면 수많은 남의 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노래 부르다 ‘색깔’마저 잃는다

오랫동안 겹치기로 밤무대를 뛰다보면 자기 노래 색깔을 잃버리게 된다. 그래서 밤무대는 무명 가수들을 영원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쉘부르에서 만난 김용환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업소를 뛰게 되면 박자 관념이 없어지게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노래를 늘였다 줄였다 해야 하거든요. 레스토랑에서는 그 분위기에 맞게 잔잔하고 그윽한 음악을, 호프집에서는 또 거기에 맞는 음악을 해야 하잖아요.”

물론 무명 가수들 속에서도 나름대로 ‘인기 가수’가 있고 인기 정도에 따라 개런티가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한 무명 가수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촌은 무명 가수들의 중앙무대”라며 “그래도 노래를 ‘한다’ 하는 가수들만 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력이 짧은 무명 가수일수록 방송을 타는 끈을 잡기 위해 일단 미사리로 진출하려 애쓴다고 귀띔했다.

무명 가수들의 소외는 메이저 음반기획사들이 ‘승자 독식’의 룰을 만들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는 살인적인 텔레비전 시청률 경쟁도 한몫 거든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 프로듀서들도 한량끼가 있었다고 할까, 넉넉한 프리랜서 기질이 풍부해서 새로운 신인을 발굴할 여유가 있었다”며 “하지만 90년대 들어 시청률 경쟁이 불붙으면서 그런 여유가 없어졌고 자연히 무명 가수 집단이 대중매체를 통해 스타가 될 기회는 원천봉쇄됐다”고 말했다.

물론 무명 가수들의 노래가 음악대중의 가슴을 적실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고 누구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무대에 서고 있는 수많은 무명 가수들은 자신의 ‘재능’이 우연히 또는 한순간에 대박으로 터지는 꿈을 꾸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자신의 노래가 날개를 달 때까지 노래를 버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비록 영영 밤무대 가수로 끝나고 말지라도.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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