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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뿌리는 어떻게 이어졌나

등록 2003-07-30 15:00 수정 2020-05-02 19:23

[구한말 유림의 지형도]

고당 김충호 선생이 학맥을 잇고 있는 간재학파는 구한말 유림의 지형도를 형성한 4가지 학파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 유학사는 성리학을 주류로 양명학, 경학, 실학이 잇따라 등장하며 전개됐다. 이 가운데 성리학의 흐름은 크게 퇴계 이황을 잇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계승한 기호학파로 나뉜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면 학설의 내용으로 볼 때 사실상 위와 같은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어지며 중요한 학자별로 독자적인 연원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유림들은 학문적 내용과 인적 구성을 바탕으로 기호 계열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 간재학파(艮齋學派)와 영남 계열의 한주학파(寒洲學派) 4개 학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학파 연원을 대표하는 화서 이항로(1792∼1868), 노사 기정진(1798∼1879), 한주 이진상(1818∼1885), 간재 전우(1848∼1922)는 각각 학설의 내용이나 외세의 압력에 대한 대처에서 차이를 보였다. 학설로 보면 화서, 노사, 한주는 독자적인 성리설을 주장함으로써 주자학을 수정하는 쪽에 서 있었으며, 간재는 율곡의 성리설에 기초한 전통적 논의를 고수했다. 구한말 외세의 침입이 가속화되는 국망(國亡)의 상황 속에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도 달랐다. 화서학파와 노사학파는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주도하였고, 간재학파는 서해의 부안 계화도로 망명하여 유학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다. 한주학파는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하거나 일부는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 사고를 보였다. 이처럼 학파별로 각기 달리 행동한 것은 국권이 상실되는 상황 속에서 유학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각 학파가 지녀온 철학적 배경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간재학파의 종장인 간재는 리무위(理無爲·리는 작용이 없다), 성사심제(性師心弟·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다), 심본성(心本性·심은 성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등의 명제를 제시하여 화서, 노사, 한주 등을 비판함으로써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논쟁은 조선시대 성리설의 분화를 마무리지었다는 사상사적 의미를 갖는다. 간재에게 리(理)는 본래 통일적 원리로서 이 세계에 주어져 있는 것이었으며,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는 기(氣)의 세계에 있었다. 간재에 의해 제기된 성사심제의 명제도 성(性)을 우위에 놓는 것이기는 하지만 논의의 중심은 심(心)에 있었다. 성은 현실적 연관 속에서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 덕목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유교적 질서에 의해 구축된 현실 세계의 원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며, 현실 세계의 혼란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간재가 학자로서 자처하고 은둔자의 길을 택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과 현실 인식은 간재로 하여금 말년에 서해의 외딴 고도를 전전하게 하였으며, 유학의 도를 전하고자 하는 염원 아래 삼천의 제자를 길러내도록 했다. 당시 간재 문하의 제자들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명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간재의 사상과 처세관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들은 스승의 염원과 학설을 지키는 데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재 관련 분야의 학계와 재야에서 활약하는 인물의 상당수는 간재의 학맥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대학뿐만 아니라 전통서당, 한문교육기관 혹은 유림 단체 등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끊어져가는 한학의 맥이 그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간재의 재전재자(제자의 제자)로서 당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창수 정형규의 제자인 최근덕(전 성균관 관장, 현 유교학술원 원장) 원장을 들 수 있으며, 양재 권순명의 제자인 김충호 원장은 성균관 한림원 원장으로서 한학 전문가 양성에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상호 | 대구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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