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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한국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10-15 03:55 수정 2020-05-02 19:29

홍콩에서 시위 중 마스크 착용이 금지됐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마스크 착용 금지는 꽤나 오랜 역사를 지녔다. 1845년 미국 뉴욕에서 지주와 소작농이 충돌했다. 이를 계기로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이 금지됐다. 공공의 안전이 명분이었다. 뉴욕에서만이 아니라 오하이오, 앨라배마, 캘리포니아, 워싱턴DC, 플로리다,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마스크 착용은 많은 주에서 제한됐다. 핼러윈데이나 마디그라 축제 등 예외를 두긴 했으나,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고 신원을 숨기는 것이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주로 불법시위에서 마스크 착용은 또 다른 처벌의 대상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지에서도 비슷한 법이 있었다. 2015년 스페인에서도 시위 중 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개그법’이 추진됐으나, 저항에 부딪혀 좌초됐다.

항구도시 홍콩에서도 마스크 착용 금지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1922년 선원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는 1967년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처음 실행됐다. 그리고 다시 2019년 10월 ‘광복’ ‘독립’ ‘임시정부 수립’까지 외치는 홍콩 시민의 입을 막기 위한 마스크 착용 금지 내용이 담긴 긴급법이 선포됐다.

남의 나라만의 일일까. 2003년 경찰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복면을 쓴 집회 참여자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을 넣도록 국회에 의견을 냈다. 복면을 쓴 이들은 불법행위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 반발에 흐지부지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 집회·시위 선진화 방안으로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 행위 금지를 다시 추진했다. 선진 시위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일까. 아무튼 이 또한 반발에 부닥쳤다.

마스크 착용은 두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이 분명 있다. 미국의 마스크 금지법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큐클럭스클랜) 등 범죄자나 범죄단체가 얼굴을 숨기거나 범죄를 가리는 데 복면이 쓰여, 이를 금지하는 취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란계 미국인이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새 이란 지도자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할 때 신원이 드러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마스크 착용 금지법에 저항했고 끝내 폐기시켰다. 마스크 착용은 표현의 자유란 헌법적 가치로서 더욱 크게 자리매김했다. 이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사주 일가의 퇴진을 외치고,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자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에 맞서 시위하는 모습은 너무 자연스럽다.

홍콩에서는 시계가 거꾸로 간다. CCTV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홍콩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수단은 마스크다. 14살 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는, 시위 중 체포된 2400여 명 가운데 3분의 1이 미성년자인 홍콩에서 마스크마저 허용하지 않는 것은 시민의 자유에 마스크를 씌워 질식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는 홍콩 시민들이 5월 광주의 을 부른다고, 2016년 촛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뉴스를 듣고 우쭐해한다. 하지만 총탄에 쓰러지는 그들의 외침에는 좀체 연대하지 않는다. 이재호 기자가 지난 8월 홍콩에 가서 만난 우산혁명 주역 조슈아 웡은 한국이 홍콩 지지 발언을 해주길 부탁했다. 그때 우린 침묵했다. 냉혹한 국제 현실정치를 읊조리며, 중국이란 힘센 나라를 떠올리며 외면했다. 그들이 마스크를 써야 할 때 침묵한 우리는, 우리가 마스크를 써야 할 때 누구에게 연대와 지지를 구할 수 있을까.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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