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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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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등록 2019-05-21 04:07 수정 2020-05-02 19:29

4월4일 목요일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마감날이었다. 저녁 7시30분께 옆자리에 앉은 장수경 기자의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그의 동생이었다. 장 기자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산불이 나서 지금 리조트 주차장에 사람들이랑 모여 있다는데 어떻게 하라고 해야 하지?” 장 기자의 임신부 동생은 남편과 강원도 속초 여행을 간 참이었다.

마감에 집중하느라 챙겨보지 않았던 강원도 산불 뉴스를 찾아봤다. 방송 뉴스 특보 화면을 빨갛게 채운 산불은 초속 7m 강풍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장 기자의 동생은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행히 1시간 뒤 장 기자의 동생은 불이 옮겨붙지 않은 경로를 파악해 차를 타고 무사히 대피했다.

나는 일단 눈앞에 닥친 마감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이후 산불 진화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뉴스나 신문에 나온 이재민들의 처지에 안타까워했다. 대피하지 못하고 죽은 동물이나 불에 그슬린 강아지들 사진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원도 산불에 대한 내 관심은 흐려졌다.

다시 강원도 산불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은 4월15일 국회에서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 이행을 위한 정책 간담회’가 열렸다는 전자우편을 보고 난 뒤였다. 간담회에 못 가 자료집을 구해 봤다. 장애인 재난 안전과 관련해 여러 장애인 단체들의 절절한 요구가 담겨 있었다. 2016~2017년 경북 경주·포항 지진을 겪고 정부도 장애인 재난 안전 시스템이 뻥 뚫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월4일 밤을 다시 떠올렸다. 속초, 고성, 강릉에 사는 장애인들은 어떻게 재난 사실을 알고 어디로 대피했을까. 그날 지켜보던 뉴스 특보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방송이 없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취재로 옮기는 것에 망설였다. 산불이 난 지 시간이 꽤 흘렀고 진화도 잘 마무리됐다는 사실 앞에서 주저했다. 훌륭하고 발 빠른 다른 언론의 몇몇 기자가 산불 발생 다음날 장애인 재난 안전에 대한 취재와 보도를 한 것도 걸렸다. 시의성을 중시하고 다른 언론보다 앞선 보도 여부를 따지는 한국 언론의 관성에서 못 빠져나온 것이다.

취재를 고민하면서 주문한 책 을 펼쳤다. “언론은 재난으로 방파제 관리 소홀 같은 대비 부족 문제가 드러난 경우에 한해서 첫 번째 국면에 일시적인 관심을 갖는다. 세 번째 국면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두었다가도 빠르게 거둔다.” “재난 발생 기일이 돌아올 즈음 복구가 얼마나 잘됐는지(그보다는 제시간에 얼마나 복구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보여주려는 때가 있지만, 그 관심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책은 ‘국면1’을 재난 발생 전, ‘국면2’를 재난 발생, ‘국면3’을 재난 복구 과정으로 구분한다. 얼굴이 빨개졌다. 책에서 묘사하는 언론이 바로 나였다. 바로 속초와 고성을 찾았다. 그 결과물이 제1262호 표지이야기 ‘장애인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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