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31일 새벽, 박근혜가 감옥에 들어갔다. 오후, 세월호가 항구에 도착했다. 저녁, 나는 마지막 편집장 칼럼을 쓴다.
이 하루가 지나도 일의 실타래는 계속 이어진다.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박근혜를 잡아넣고 세월호를 인양했으니, 그 일에 눈곱만큼이나마 힘을 보탰으니, 일단 됐다. 이만하면 됐다. 내 몫은 여기까지다. 한숨 돌릴 겸, 오늘은 하찮은 이야기를 적는다. 그래도 괜찮은 날이지 싶다.
항상 를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8년 5월 이 신문 창간호가 나올 때부터 매일 가판대에서 신문 2개를 사들고 등교했다. 하나는 내가 읽고, 하나는 교실 책상 아무 곳에나 올려뒀다. 반 친구들이 돌려 읽었다.
이듬해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그 시절 전교조 교사는 ‘참교육’의 상징이었다. 학생을 때리지 않는, 때리지 않고도 잘 가르치는, 성적이 나빠도 존중해주는 선생님이 곧 전교조 교사였다. 그들을 해직시킨 정부를 용납할 수 없었던 나는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하게 됐다. ‘세상 바꾸고 싶으면 대학 가서 출세하라’는 말을 싫어하게 됐다. 정의를 위해 당장 무엇이건 하고 싶었다.
1989년 겨울, 우여곡절의 모의와 준비를 거쳐 대구 민주고등학생 모임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만들었다. 여러 학교의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고등학생들 스스로 ‘참교육’을 구현해보자고, 친구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일종의 비밀조직이었지만, 결국엔 아이들 소꿉놀이 비슷했다.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고 짐짓 도취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고 위태로웠다.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징계를 당하거나 퇴학당한 친구도 있었다. 가슴마다 깊은 상처가 남았다. 대부분은 그 뒤로 중년이 되도록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그들을 부추겼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주저앉아버렸다. 수치스럽고 분하여 유서를 썼다. 작은 수첩에 적어 가슴에 품고 다녔다. 매일 밤, 독서실 옥상에서 하늘을 올려보고 땅을 내려보았다.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1990년 6월의 어느 밤, 전화를 받았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수찬아, 그 친구, 그 조용하던 친구… 기억하나?” 물론 기억했다. 나는 그에게 직접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학생회 활동에 나섰다. 그해 봄 내내 교사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다. 그랬던 그가 어느 대학 옥상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고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전했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내가 먼저 죽었어야 했다.
힘과 넋이 빠져나간 다음날 아침, 신문 가판대에서 를 습관처럼 샀다. 읽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막았어도 꺼이꺼이 소리가 목에서 올라왔다. 사회면 머리기사에 그 친구의 죽음이 실려 있었다. 유서 내용도 전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우리 학교는 학생이 다닐 학교가 못 된다. 나의 죽음을 왜곡하지 말라.”
세상 아무도 우리를 몰라주는 것 같았는데, 모든 언론을 통틀어 오직 만 그의 삶과 죽음을 기록해주었다. 고맙고 또한 서러웠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살아남아 이 모든 일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그 뒤로 오랫동안 ‘책임의 세계’에 살았다. ‘채무의 세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친구 몫만큼 살아야 한다 생각했고, 그 끝에 선택한 것이 한겨레신문사였다. 기자가 된 뒤로는 이 매체의 정수를 지키고 확산시키는 것이 평생의 채무를 갚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정수가 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2000년대 후반이었고, 2년 전 편집장을 맡으면서 빚갚음의 마지막을 치르자고 결심했다.
고등학생들이 죽어간 세월호 참사에 몰입했던 것, 박근혜로부터 군사독재를 떠올렸던 것 등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이제 고백한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꽁꽁 힘주어 생각했다. 죽은 이를 기록하고 죽인 이를 징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의를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난 2년 내내 대구 경화여고 3학년 김수경을 생각했다. 그는 검은 뿔테 안경에 곱슬머리였고, 추레한 점퍼를 입고 다녔으며, 수십 명의 친구들이 어느 방에 둘러앉아 참교육 운동을 토론할 때, 조용히 머리 숙이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제 그와의 채무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빚갚음은 다하지 못했지만, 그 친구도 내가 어찌 살았는지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젠 책임의 세계를 떠나 좀 재미나게 살려고 한다. 그동안 나를 괴롭힌 또 다른 물음에 답하려 한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 나는 무엇으로 이뤄졌는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그 질문에 답하는 마음으로 다른 부문에서 새 일을 시작한다.
그동안 함께 ‘책임의 세계’를 지킨, 유연하고 세련되며 탁월한 매체를 만드는 일에 헌신했던 모든 선·후배·동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들은 조울증에 깐깐함을 장착한 나를 편집장으로 받아주고 인내하여 관용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자가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만 그들의 대접에 부응하지 못하고 몰아세워 상처 준 일이 많았다. 새로운 저널리즘을 구현하자며 닦달하기만 했다. 그 후회까지 담아 그들의 미래를 응원한다.
삶은 모호하고 애매한 틈새에서 우연적으로 자라난다. 삶을 낙관하기란 그래서 쉽지 않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도리가 없는데 어찌 미래를 긍정하겠는가. 다만 인류 진화의 오랜 결과로 우리는 자기보호 본능을 갖고 있으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머리로 비관해도 심장으로 낙관하며 살아낸다. 그리고 대개의 정답은, 오래전 이 지면에 적었던 것처럼, 심장에 있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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