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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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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그만

등록 2016-11-05 12:18 수정 2020-05-02 19:28

대신 적어드립니다.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국민 여러분. (‘존경하는 국민’이라 시작하면 “거짓말”이라고 다들 비웃는 거 알지요?)

저는 누구입니까. 제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요설에 놀아나다 황야로 쫓겨난 리어왕의 독백입니다. 요즘 개인 정체성 혼란이 극심하지요?)

참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태민씨 기일에 맞춰 청와대에서 굿을 벌이고 일부러 세월호를 침몰시켜 아이들의 목숨을 바쳤다는 것입니다.(‘청와대 굿판’ 루머를 들었다니, ‘인신공양’ 루머도 알고 있겠지요?)

오죽하면 그런 말을 입에 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참담한 마음으로 밤잠 설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참담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 말에 혹해 대통령 걱정할 사람은 국민의 5%도 안 되는 것을 알지요?)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습니다. (11월4일 연설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된 대목이니 한 번 더 써도 좋겠지요?)

몹시 부끄럽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 앞에서 울먹이며 했다는 말을 빌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겠지요?)

더 이상 제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1997년 대통령 아버지를 믿고 국정을 농단한 김현철씨의 사과 성명입니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주려다 그랬다”는 단서를 붙여 오히려 욕만 먹었지요?)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파탄의 책임은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1998년 외환위기 가운데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문입니다. 다음 대선 때까지 거국내각이 필요하니, 박정희 독재에 맞섰던 그의 뜻을 배워야겠지요?)

이를 위해 저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할 것입니다.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저에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퇴임 성명입니다. 국부로 숭배해왔으니 그 마지막도 알고 있지요?)

우선 저의 재산은 국민의 뜻에 따라 정부가 처리해주십시오. (1988년 전두환 대통령의 사과 성명입니다. 아버지의 축재를 전두환이 챙겨 그 일부를 당신에게 건넸고 이후 최태민 일가와 함께 불려왔으니 모두 내놓는 게 마땅하겠지요?)

아울러 최종 책임자였던 제가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감옥에 가겠습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2003년 대선 불법 자금 사과 성명입니다. 덕분에 한나라당이 그나마 연명하고, 당신은 당대표가 됐지요?)

국민 여러분, 면목이 없습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고개 숙여 인사 뒤 퇴장) (2009년 검찰에 소환당한 노무현 대통령이 경남 봉하 자택을 나서면서 남긴 말입니다. 기억나지요? 당신을 비롯한 한나라당의 탄압에 희생됐다고 울부짖던, 노랗게 분노하여 일렁이던 그 봄의 파도도 기억나지요? 어떻게든 명예를 지켜야 하는, 자신이 아니라 국민의 명예를 지켜야 하는, 그 명예를 지킬 방법을 고통 속에 마지막까지 숙고하는 이가 대통령임을 그때 이미 알았지요?)

그러니 세 번째 담화에선 이렇게 읽으면 됩니다.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제가 최순실보다는 글을 잘 씁니다. 이제 그만두면 됩니다. 그만. 제발 그만.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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