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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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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성

등록 2016-05-24 05:47 수정 2020-05-02 19:28

* 아래 글의 필자는 강명지(페이스북 이름 강나위). 전주 남부시장에서 바 ‘차가운 새벽’의 오너 바텐더와 청년몰 선출대표를 맡고 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지난 5월19일 페북에 올린 그의 글을 발췌·요약한다. 이유는 맨 아래에 적는다.

“고등학생 때였다. 하교 때 공원 화장실칸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더러운 행색의 남성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팬티와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한 번만, 한 번만”이라고 말했다. 놀랐고 무서웠고 화났지만 때리고 할퀴고 물어뜯었다. 쉰 땀내에 토기가 올라와도 지독하게 물어젖혔다. 그가 팔을 뺀 틈을 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강간범이야!” 그자가 움츠린 틈을 타 미친 듯 도망쳤다.

단숨에 집에 도착했다. 제어할 수 없는 화에 펄펄 뛰며 신고하라 소리쳤지만 가족은 일을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직접 112에 전화를 했다. 악다구니를 썼다. 강간당할 뻔했다고. 공원 화장실로 오라고. 잡으라고. 출동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오열하는데, 어머니는 “시끄럽다, 동네 쪽팔린다, 이 시간에 왜 거길 갔냐”고 나에게 도리어 화를 냈다.

목검을 들고 다시 공중화장실로 뛰어갔다. 조심히 문을 열자 그자는 또 바지를 내린 채 문 앞에 있었다. 도망치려는 걸 목검으로 때렸다. 경찰이 도착했다. 뒤늦게 내려온 어머니와 파출소에 갔다. 경찰은 ‘증거가 있냐’고 내게 물었다. 그자는 부인하다, “내가 왼팔 물었어요”라고 말하고서야 “호기심으로 그랬다”고 말했다. 눈에서 불이 튀었다. 잇자국이 아니었다면 풀려났으리라. 경찰은 그자에게 “하고 싶으면 몇만원 주고 하면 되지 왜 애를 덮쳐”라고 말했다. 공권력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몸수색을 했더니 접칼과 여아 손목시계, 여자 지갑이 나왔다. 소름이 끼쳤다. 나중에 시계와 지갑의 주인을 생각하며 울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을지 상상하면 지옥 같았다. 얼마 뒤 그가 3년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분이 지랄 같았다.

그 일은 삶에 ‘공포’를 심어넣었다. 어두운 길을 갈 때는 경계했고 한동안 불 꺼진 공중화장실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안전해 보이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안 됐다. 강남역 ‘수 노래방’ 화장실은 내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화장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를 기다려 살해하기엔 충분한 곳이었다.

그런 일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조심한다고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주의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그 일은 내가 ‘약자’이자 ‘만만한 존재’로서의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약자에게 ‘그래도 된다’라는 공기가 가득한 사회였기 때문에 일어난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 새끼가 작심하고 칼부터 들지 않아서, 목청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폭력을 저지하고,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낸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다. 차별이 공기처럼 당연한 곳에서 내 말은 별것 아닌 여자의 목소리다. 다른 남성을 설득할 수 있는 연대자로서의 남성의 역할은 중요하다.”

* go21@hani.co.kr로 각자의 경험을 보내주시면, 지면에 실어 더 많은 이와 나누겠다. 차별의 폭력을 막으려면 더 많은 아우성이 필요하다. 결국, 약자의 무기는 아우성이다. 함께 아우성치자.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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