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투구꽃

등록 2015-10-06 07:38 수정 2020-05-02 19:28

얼마 전, 지리산을 종주했다. 산 위도 아래도 비와 구름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지천에 핀 보라색 꽃만 보며 걸었다. 길벗 삼은 그것이 투구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처럼 혼자 길 나선 이가 적지 않았다. 단순하고 고된 일을 하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뉴스를 전하는 일을 생각했다. 산에 올라서라도 이별하고 싶은 ‘과잉정보 세계’에서 우리는 왜 굳이 또 다른 기사더미를 욱여넣으려 하는가. 이것은 도대체 뭣하자는 일인가.
널렸으되 소용될 곳 없는 개똥 같은, 불명확한 개념과 불완전한 범주로 구획지어진 그림을 지난 몇 주 동안 끼적이고 지우고 또 채우고 있다(그림 참조).

누구나 통곡할 이유 하나씩 품고 지내는 나라에서 모두의 화두는 생존이다. 살아지는 것을 넘어 살아내고 싶지만 그조차 쉽지 않아 죽어버리는 이가 늘고 있다. 생존조차 대단한 과업이 됐다. 그 세상의 필수 정보는 ‘오락’이다. 슬픔을 잊게 만드는 게임·유흥·놀이다. 그 궤적을 따라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현실을 지우거나, 몸뚱아리 하나라도 지키려고 건강 정보를 뒤적인다. 가장 인기 많은 미디어 콘텐츠는 그에 부합하는 것들이다.

몸뚱아리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에 무엇인가 장착하려고 교양·지식을 찾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그들은 ‘좋은 뉴스’의 잠재적 소비자이지만, 기성 언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이기도 하다. 결국 오락-문화-건강-지식으로 이어지는 ‘뉴스 냉담자’들은 뉴스를 소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들의 삶은 뉴스의 영토 바깥에 있다.

맹렬한 뉴스 소비자는 경제(권)력으로 생존을 해결하려는 이들이다. 경제 전문가들의 알 수 없는 조언을 꼼꼼히 수집한다. (지나치게) 많은 경제 매체가 그 영토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익이 되는 뉴스가 진짜 뉴스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좋은 뉴스’는 이물감 나는 말이다. 좋은 뉴스가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되는지 알 수 없는 한, 그들은 ‘좋은 언론’의 탄생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득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엇인가 저주라도 해야 한다. 이 지경으로 사는 게 내 탓일 리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슈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물론 어떤 분노는 정당하다. 다만 대중이 주목하는 사회 기사 대부분은 특정인(집단)에 대한 말초적 분노와 잇닿아 있다. 거두절미하고 누군가를 매장시키는 적개심이 들불처럼 번진다. 그 적개의 에너지는 가공할 정도여서 종종 소름 끼친다. 여기서 선정·단편·표피 보도가 태어난다.

경제·사회 뉴스 소비자보다 군집의 크기는 작지만, 가장 충직한 뉴스 소비자가 정치 영역에 모여 있다. 다만 이들이 소비하는 것은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뉴스다. 심리학·언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편향 지각을 통해 뉴스 대부분을 배척하고, 적대적 매체 지각을 통해 기성 언론 대부분을 냉소한 뒤, 성향에 맞는 특정 매체에만 몰두한다. 그러니 이익의 경제, 적개의 사회, 편파의 정치를 소비하는 ‘뉴스 수용자’ 궤적을 따라가도 좋은 언론의 자리는 희귀하다.

그리고 뉴스 수용자·냉담자 모두 디지털에 웅거한다. 자본과 인재가 없으면 그들의 집결지에 진입하는 것부터 힘들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기자들의 혁신 토론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독자들의 지혜도 빌리고자 한다.

모두 아우른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어느 대목에 집중하여 좋은 언론으로 거듭나야 할지, 의견을 보내주십사 부탁드린다. 개똥 같은 그림을 통찰의 설계도로 바꿔주시길 부탁드린다. 발톱 빠지게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의 유일한 벗, 독을 품었지만 약으로 잘 쓰면 신경과 관절을 되살리는 꽃, 투구꽃을 닮은 독한 말씀을 ahn@hani.co.kr에서 귀하게 받아 읽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