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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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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1)

등록 2015-07-28 14:20 수정 2020-05-03 04:28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불리는 ‘워터게이트 보도’는 도청 사건 보도다. 1972년부터 2년여 동안 일어난 일을 간추리자면, 대통령이 상대 정치세력을 도청했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백악관이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이를 방해했고, 언론이 추적 보도하자, 의회가 조사에 나서 대통령이 하야했다.

칼 번스타인 기자. AFP 연합

칼 번스타인 기자. AFP 연합

보도의 주역인 의 칼 번스타인 기자는 2011년 4월 어느 토론회에서 질문을 받았다. “(언론 보도로 대통령이 물러나는) 워터게이트 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가능할까요?” 번스타인은 되물었다. “그 시절엔 ‘미국의 시스템’이 작동했어요. 언론과 법원이 제 할 일을 했지요. 그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공화당이 (자기 정당의) 대통령에게 하야를 종용할 수 있을까요?”

워터게이트 보도는 언론이 세상을 바꾼 사건이 아니라, 언론을 포함한 세상이 함께 움직인 사건이다. 기자들의 순진한 기대와 달리 대개의 특종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특종에 감응하는 세상에서나 기자는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시스템’의 놀라운 국면이 워터게이트 사건 곳곳에 등장한다.

사건의 출발은 ‘반전활동가’였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베트남전을 수행하던 닉슨 대통령에게 반전활동가는 눈엣가시였다. 배후에 민주당이 있다는 의구심도 품었다. 한국 상황에 비유하자면, 이른바 ‘종북주의자’와 새정치민주연합의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여론은, ‘빨갱이’로 몰렸던 반전주의자의 처벌보다, 그들을 도청한 권력의 부당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추적하는 언론, 의회, 법원의 일거수일투족이 온 나라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닉슨 대통령이 임명한 특별검사는 누구한테 임명받았는지 금세 잊었다. 투명하고 철저하게 수사를 벌였다. 대통령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법원은 양심대로 움직였다. 대통령의 특권을 내세워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닉슨에게 미 대법원은 관련 특권을 무효화하여 도청 기록을 공개하도록 강제했다.

의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청문회 현장은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탄핵안이 하원에 제출되는 과정에서 상당수 공화당 의원이 민주당과 뜻을 함께했다. 탄핵 사유는 권력남용, 사법방해, 의회모욕 등이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해 입법과 사법을 흔드는 것을 공화당 의원들도 묵과할 수 없었다. 닉슨이 스스로 하야한 것은 공화당 일부 의원까지 가세한 탄핵안 통과가 확실시됐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이 말한 ‘미국의 시스템’이란 ‘제 할 일을 하는’ 집단의 총체다. 권력의 불법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기자,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적으로 수사하고 판결하는 법조인,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민주주의 가치를 더 근본에 두는 국회의원 등이 그 시스템의 실체다. 이것이 한국에 있는가. 다만 한때라도 존재한 적 있는가. 앞으로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오늘날의 미국에 대해 번스타인이 비관한 것은 언론이 아니라, 언론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그는 여전히 언론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보도와 같은) 기사를 내놓을 언론이 여전히 많고 오히려 더 잘 보도할 것”이라고 같은 자리에서 말했다. 그의 발언은 워터게이트 이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심지어 체제의 적에 대해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정보기관의 감시·첩보 활동을 추적보도해온 후배 기자들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앞으로 이 지면을 빌려, 국가정보기관의 도·감청 등에 대한 외국 언론의 주요 보도를 두어 차례 소개하겠다. 힘들고 더디게 진행되는 와 의 공동취재를 지켜보는 관전 포인트라 생각해주어도 좋겠다. 한국의 의회, 검찰, 법원이 뭘 어쩌건 간에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내겠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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