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희진

등록 2015-05-05 08:08 수정 2020-05-02 19:28

작은딸. 앞니 빠진 초등학교 1학년. 샘이 많고 호기심 많은 아이. 어울리는 옷을 혼자 골라보고 입어보는 아이. 잠깨기 싫어 칭얼대지만 일어나면 세상이 궁금해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 내 아이. 희진.

아빠가 비밀 이야기 하나 해줄게. 옛날 이야기 아니야. 넌 옛날 이야기 싫어하잖아. “시시하다” 했잖아. 대신 목소리 낮춰 “비밀 이야기 있어” 하면 고양이처럼 다가오잖아. 아빠 입에 조막만 한 귀를 갖다대잖아. 그래 오늘은 진짜 비밀 이야기야.

7년 전 초가을, 때늦은 쓰르라미가 ‘씨룽, 씨룽’ 울 때 네가 아빠한테 왔어. 태어난 지 일주일, 병원 초음파 검사실에 갔어. 너는 은빛 물고기처럼 몸을 뒤척여 울었지. 흑백의 화면에 보이는 게 무언지 아빠는 관심 없었단다. 빨리 검사가 끝나서 네가 평온하게 잠들 수 있기만 바랐어.

희진, 작은딸. 이제는 작지 않고 훌쩍 커버린 딸. 그 작은 아이의 심장에 바늘보다 작은 구멍이 있다고 의사는 아빠한테 말했어. 아빠의 심장에도 구멍이 생겼단다. 너를 신생아실에 들여놓고 아빠는 병원 구석 벤치에 앉아 쓰르라미 소리를 들었어. 아빠 잘못이라 생각했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함부로 살아온 벌을 네가 대신 받는 거라 생각했어.

그날 이후 매일 밤 우리는 심장을 맞대고 잠들었어. 아빠의 왼쪽 가슴 위에 너를 올려 안았어. 너와 심장을 맞바꾸고 싶었단다.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도했단다. 눕히면 금세 깨어나 너는 울었어. 너는 평형보다 수직을, 땅보다 하늘을 향하길 좋아했어. 아빠는 소파에 앉아 네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어.

그러기를 두 달여, 의사가 말했어. 세 개의 구멍이 저절로 다 붙었다고.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아빠는 의사를 불러내 대접했단다. 고맙다고 머리 숙이고 술을 건네고 음식을 권했단다.

삶은 우연과 충동으로 가득 차 있지.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단다. 다만 그 가운데 섬광처럼 반짝이는 감격의 순간이 드물게 찾아오는데, 어른들은 그걸 기적이라 부른단다. 그런 기적을 꿈꾸며 산단다.

희진, 작은딸. 중간고사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고등학교 1학년 언니가 부럽다는 철부지 딸. 너는 그런 기적이란다. 그렇게 희귀한 기적을 제외하면 세상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번민이란다. 삶은 공평하지 않아. 아픈 아이, 슬픈 아이, 가난한 아이,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많단다. 그런 시절을 거쳐 여전히 아프고 슬프고 가난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어른도 너무 많단다.

아빠가 친구들과 함께 만든 이번호는 너와 네 친구들에게 내미는 작은 손이야. 세상의 모든 기적들에게, 그리고 그 기적 같은 어린이들이 만나게 될 슬픈 세상에게 내미는 손이지. 이번 기획을 이끈 박수진 기자는 두 살 딸을 기르는 엄마야. 아이 같은 미소로 우리 모두에게 평온을 주는, 아빠의 좋은 친구야. 함께 도운 송채경화 기자와 김선식 기자는 한두 달 뒤면 각각 엄마와 아빠가 될 거야. 세상 모든 아이를 가슴에 담고 사는 정은주·이문영·전진식 기자는 특별히 동화를 써서 이번호에 실었단다.

아빠와 친구들은 아이에게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어른을 믿지 않아. 그저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어른을 믿지 않아. 희망보다 위대한 것은 진실이지. 좋은 어른은 그 진실로 향하는 길을 아이에게 안내하는 사람이라고 아빠는 생각해. 희진, 작은딸. 이름 그대로 ‘진실을 갈구하는’ 아이. 네가 어른이 되어 세상의 슬픔에 너무 힘겨워하지 않도록 더 많은 진실을 알아내볼게. 진실이야말로, 슬픈 세상 버티게 만드는, 너를 닮은 기적이란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