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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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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해라

등록 2014-06-24 05:42 수정 2020-05-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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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아이는 학교 생활이 꽤나 즐거운 듯하다. 하기야 아직은 힘든 공부도 없고 고3처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한자 시험을 본다는 공고문을 받았다. 학교 안에서 보는 시험으로 점수에 따라 상장을 준다고 했다.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어쩌지? 한글과 수학만 시켰지, 아직 한자는 모르는데.” 그런데 이것은 내 상황일 뿐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초등 입학 전부터 한자 학습지로 공부하거나 한자 급수 시험 준비까지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순간 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한자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도대체 엄마라는 사람이 무얼 했는지 자책이 됐다. 시험에 참고하라며 몇 장 나눠준 한자들은 언제 다 아이에게 외울 정도로 가르쳐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난 아이에게 “이것도 외워야 하고, 이 한자는 이런 뜻이고, 이것 부수도 잊으면 안 되고…” 급하게 이것저것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는 손가락 여덟 개를 펴며 “엄마~ 나 천천히 해도 돼. 이제 난 8살인걸” 하고 말했다. 아이의 이 한마디를 듣고 무언가에 맞은 듯 한동안 멍했다. “아이가 학교 생활을 시작하면 절대 다그치지 않고 아이의 마음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줘야지”라며 내 자신에게 그렇게 다짐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8살 어린 나이에도 분명 또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어 소설책을 읽고 영어회화를 잘하는 아이도 있고, 수학을 3년 뒤 것까지 선행학습을 한 아이도 있고, 피아노를 잘 쳐 체르니를 뗀 아이도 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조금 일찍 시작해서 꼭 앞서나가는 것만도 아니고 우리 아이가 조금 늦게 시작해서 꼭 뒤처지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면 어쩌지? 성적이 떨어지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는 부모로서의 불안감이 많은 잔소리로 이어지고 또 여러 학원으로 돌려가며 보내는 것으로 해소되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커간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느린 달팽이가 걷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방황하지 않도록 동행해주는 것이 우리 부모의 몫이 아닐까?

나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조바심을 내지 말고, 사랑하는 내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응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었으면 한다.

김해경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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