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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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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개혁신당"

등록 2002-09-04 15:00 수정 2020-05-02 19:22

국민후보 지원세력 중심 개혁적 정당 태동… 현실적 영향력에 회의적 시각에도 잰 걸음

최근 절필선언을 한 뒤 ‘개혁적 국민정당’(이하 개혁신당) 추진을 주도하고 있는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8월28일 밤늦도록 컴퓨터 모니터를 지켜봤다. 이날 낮 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개혁신당 구상을 선보인 뒤, 그 반응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기대 밖의 대성공이었다. 기사가 뜬 지 12시간도 안 돼 독자의견 달기가 2천개를 넘어섰고, 그 내용 또한 “유월항쟁 그 명동 한복판에 섰던 바로 그 가슴떨림이 오늘 다시 시작됩니다”는 식의 감동이 넘쳐흘렀다. 다음날 대학로 흥사단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발산됐고, 개혁신당 발기인 수도 제안 이틀 만에 6천명을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자발적 당비를 납부한 창당 발기인을 10만명 정도 모집해 추석을 전후로 법적 효력을 갖는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할 계획”이라는 유씨의 야무진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씨 제안으로 창당 발기인 모아

개혁신당은 ‘국민후보 지키기 시민운동’에서 시작됐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 지지자들이 8월13일에 맞춰 지지선언을 하기 위해 모였다. 지지모임의 틀도 처음에는 ‘국민 선대위’ 정도로 의견을 모아갔다. 그러다가 “노무현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정치를 새롭게 한번 바꿔보자”는 얘기가 나오면서 논의의 물꼬가 갑자기 신당 창당쪽으로 돌아갔다. 여기에 희망네트워크, 제3의 힘, 자치연대 등 ‘정치세력화’를 고민해오던 다른 논의 단위가 얹히면서 신당론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노 후보를 지키기 위한 개혁신당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이디어는 노 후보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민주당 신당추진위원회(위원장 김영배)에서 배워온 것이다. 유씨는 “우리가 아마추어인데 당 창당에 관해 뭘 알겠느냐. 아 저런 방식도 있구나, 하고 한수 배웠다”고 귀띔했다. 즉시 뜻이 맞는 사람 40여명이 500만원씩을 내놓았다. 유씨와 영화배우 문성근씨, 이용철 변호사, 유기홍 희망네트워크 실행위원장 등 40대 중반이 중심이다.

하지만 개혁신당은 그 출발과 더불어 이들의 손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개혁신당 홈페이지(www.vision2002.org)에 몰려든 당원들이 당의 성격과 진로를 스스로 결정해나갈 태세기 때문이다. 유씨조차도 “불은 질렀고, 불이 번지기는 할 것 같은데, 어디로 번질지는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당장 노 후보와의 관계설정 문제도 예사롭지 않다. 노 후보를 중심으로 한 개혁정당이 창당정신이건만, 토론회에서는 “개혁신당이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신당의 외연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유씨는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으니 시간을 가지고 논의해봐야 할 것”이라고 물러섰다.

하지만 본격적인 논쟁은 개혁신당과 민주당의 결합 여부 내지 그 방식을 놓고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개혁신당 제안자들은 3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있다. 첫째는 노 후보가 민주당 다수파를 이끌고 개혁신당에 합류하면서 개혁신당이 거대 개혁정당으로 확대되는 경우다. 둘째는 민주당과 통합이 안 된 채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따로따로 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다. 셋째는 민주당 다수파가 정몽준 의원, 자민련 등과 통합신당을 꾸리면서 노 후보가 떨어져나와 개혁신당의 후보로 옹립되는 경우다. 어느 경우든 개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되는 그림이란 없으며, 정계개편의 주체는 개혁신당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한 관계자는 “민주당 간판으로는 도저히 대선을 치를 수 없으니, 노 후보와 민주당이 우리 당 위로 올라타라는 것이다. 노 후보와 함께 올라타길 거부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오지 않아도 좋다. 아니, 사실은 안 오면 안 올수록 좋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우려에도 다양한 가능성 모색

‘금배지’ 하나 없는 정당치고는 대단한 배짱이다. 민주당쪽에선 “새우가 고래를 삼키려는 것과 같다”며 어이없어하는 반응이 나온다. 당연히 반발이 생기게 마련이다. 친이인제 성향의 이희규 의원은 “결국 노 후보를 염두에 두고 10만명 발기인이 모아지면 그 세를 몰아 압력을 가하겠다는 것”이라며 “개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따로 당을 만든다고 해서 표가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비난했다. 반노나 비노 계열로 분류되는 의원뿐만이 아니라, 민주당 내 개혁성향 의원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천정배 의원은 “개혁신당이 젊은 사람들 중심이라 노 후보의 정치적 배경이 너무 협소하게 보일 우려가 있고, 현실 정치세력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쪽으로 논의가 흐를 경우 민주당 의원들의 반작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토론회에 참가한 이재정 의원도 “무리하게 민주당과의 통합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거리를 두고 있다.

오히려 노 후보가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편이다. 노 후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국민 브리핑’에서 “한국정치사의 획기적인 새로운 변화다. 어떤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는 혁명적 사건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래도 노 후보는 역시 민주당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어, 개혁신당 제안자들과는 생각의 차이가 드러난다. 노 후보는 “지금 개혁신당이 민주당과 대화가 잘 돼서 민주당과 통합한다면, 그것은 민주당의 신당추진 프로그램과 잘 들어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후보는 과거 재야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평민련과 신민련이 각각 평민당과 민주당에 순차적으로 ‘단체 수혈’된 것처럼 개혁신당이 민주당에 집단 영입되는 그림을 희망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그것이 안 될 경우는 5년 전 자민련처럼 ‘우당’으로 남아서 자신을 지지하는 경우를 차선책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그럴 경우의 ‘교집합’은 개혁신당 제안자들의 두 번째 시나리오로, 현실적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로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혁신당의 독자 생존 가능성과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개혁신당 관계자들은 “10만 당원이면, 227개 지구당으로 나눠도 400명이 넘는 대규모로 국회의원 하나 당선시키기는 어렵지 않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사이버 당원을 현실세계의 열성당원으로 바로 등치시킨 논리적 비약이다. 조직의 열의와 응집력이 가장 높은 노사모도 회원이 5만명이 넘지만, 오프라인에서 뛰는 회원은 5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개혁신당의 정치실험에 대해 “높은 수준의 정치적 뻥이거나, 엄청나게 순진한 발상”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민주노동당원’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한 네티즌은 “한국정치를 움직이는 요소는 돈·조직·명망성·대의명분 4가지다. 정당을 잠깐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지만, 진짜로 힘든 것은 이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유지 비용에는 지구당의 경상비도 포함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정치에 ‘뜻’을 두고 정치를 위해서 활동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 활동가도 포함한다”고 지적했다. 또 이 개혁신당이 과거 총선을 앞두고 명멸했던 정치그룹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온다.

시대 흐름 반영… 순진한 발상 지적도

이런 지적들 과거의 잣대로 새로운 시도를 재단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번 실험은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변화의 폭과 깊이를 쉽게 잴 수 없다. 대중적 흡인력 측면에서 몇번의 신화를 창조해온 노무현 후보가 정신적 지주로 존재하는 점도 성공을 점쳐볼 수 있는 요인이다. 또 민주당이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그 대안을 찾으려는 욕구도 상당한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좌절로 귀결된 숱한 정치실험의 목록에 또 한줄을 끼워넣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정치지평을 열어젖힐 도전으로 기록될 것인가. 현재 개혁신당은 창조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기 복제를 해나가는 ‘생물’처럼 보인다. 그 성장과정을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의겸 기자/ 한겨레 정치부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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