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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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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할애해 한 문장이라도”

장애인 인권활동가 김권리가 말하는 장애인 정책
등록 2022-03-06 23:51 수정 2022-04-07 19:45
2021년 11월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감각장애인 선거공약연대 출범 기자회견’에서 수어통역사가 여야 대선 후보들의 장애인 공약 수립과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수어로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1년 11월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감각장애인 선거공약연대 출범 기자회견’에서 수어통역사가 여야 대선 후보들의 장애인 공약 수립과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수어로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 펼침막이 보였다. 아홉 글자가 선명하다. ‘이번 대선 나만 답답해?’
2022년 3월1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 야외 ‘광장마당’에 200명가량이 모였다. ‘세상을 바꾸는 2022 대선공동행동’(대선공동행동)이 주최한 ‘3·1 정치파티’에 모인 사람들이다. 대선공동행동은 2022년 2월 지역 시민사회단체들과 개인들이 꾸린 단체다. ‘미래의 비전 대신 네거티브와 막말이 난무하는 대선을, 답답해서 두고 볼 수가 없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이 알음알음 모였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정권 교체 아니면 정권 재창출’ ‘정권 재창출 아니면 정권 교체’라는 돌림노래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에서 지워지고 사라진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장애인,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되살려야 한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를 말할 때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 정치와 나라를 책임지기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같이 다녔던 지역주민들이 모여 만든 시민단체 ‘동서울시민의힘’ 회원들도 이날 참석했다. 김신옥진 집행위원장은 “대선 후보 TV토론을 보면 주요 후보들이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공방만 하고 정작 성평등·노동권 같은 중요한 가치는 말하지 않는다”며 “대선에서 사라진 목소리를 함께 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정치파티’의 마지막 순서는 거리행진이었다. 참가자들은 맨 앞에 ‘기미년엔 독립선언, 임인년엔 주권선언’이라고 쓴 펼침막을 세웠다. 지나가던 한 시민이 참가자들의 구호를 듣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인정, 인정. 나도 누굴 뽑을지 모르겠어.”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투표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겨레21>은 대선을 앞두고, 그동안 선거 국면에서 주요한 ‘표’로 계산되지 않은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선 후보들이 좀처럼 발언하지 않는, 국민 개개인의 삶과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총 25명을 인터뷰했고 그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20대 여성, 장애인,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기후위기 활동가, ‘차별금지법 활동가’ 등 7명이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해 글을 싣는다. 이들은 말한다. 주어진 양자택일형 시험을 거부하고 문제의 오류부터 지적해야 한다고. _편집자주

“저도 장애인이다. 장애인 이동권 확실히 보장하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2022년 3월2일 대선 후보 TV토론회

“(장애인도) 정상인과 똑같이 차별받지 않고 역량을 다 발휘할 수 있게 하겠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2021년 12월8일 서울 대학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 현장

“장애인의 이동권조차도 보장하지 않는 우리 정치와 정부에 책임이 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 2022년 2월23일 서울역 장애인 이동권 출근길 시위 현장

나는 김권리, 휠체어를 탄, 장애인 인권활동가다. 3월2일 마지막 대선 후보 TV토론회가 끝났다. 헛헛했다. 두 시간 동안 ‘장애’라는 단어는 모두 15차례 언급됐다. 하지만 유의미한 발언은 없었다. 이재명 후보가 “장애인 이동권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말한 정도다. 윤석열, 안철수 후보는 언급조차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2021년 12월부터 ‘지하철 출근길 선전전’을 시작했다. 아침 7시30분, 장애인 넷을 포함해 모두 8~9명이 주로 지하철 4호선을 탔다.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달라지지 않은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알리고 관련 예산 증액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예산은 관료가 움켜쥐고 있고, 정치는 제 할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욕먹더라도 지하철을 멈춰 세웠다. “이러니까 장애인밖에 못 되지.” “왜 출근길이야!” 육두문자까지 들어야 하는 현실이 속상했다. 2월21일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TV토론회 마무리 발언 1분을 할애해 우리 시위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21일째 이어온 지하철 시위를 잠시 중단했다. 그러나 윤석열·안철수 후보는 마지막 TV토론까지 장애인 권리를 한 번도 제대로 언급한 적 없다.

각 후보의 공약집은 겉보기엔 화려하다. 그러나 현실을 몰라 뜬금없거나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말만 번지르르하다. 코로나19 탓에 고립돼 숨진 발달장애인(가족 포함)이 적어도 18명인데, ‘발달장애인 국가 책임제’나 24시간 활동지원을 공약한 후보는 이재명, 심상정, 안철수 후보다. 윤석열 후보는 북핵을 막는 데 쓰겠다고 한 ‘성인지 예산’에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 예산 등이 포함된 걸 알까?

장애인은 항상 선거에서 밀려난 존재다. 중증장애인이 투표에 참여할 환경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발달장애인 유권자가 20만 명이 넘는데,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책선거를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 자료집을 펴냈다. TV토론회에서도 수어통역사 1명이 후보 4명의 말을 옮기다보니, 후보끼리 발언이 겹치기라도 하면 청각장애인은 소외되기 일쑤다. 이러니 유권자에 장애인인 나, 김권리는 포함돼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대선 후보의 한마디가, 한 걸음이 절실하다. 한 번이라도 현장을 찾아주고, 1분의 시간을 할애해 그저 한 문장이라도 말해준다면.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 인권단체 활동가의 인터뷰를 종합했습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대표, 류승연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 한명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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