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최대 딜레마는 3김과의 관계…개혁이미지 지키면서 현실장벽 넘을 수 있나?
“약간의 유불리를 갖고 이리저리 해달라며 김대중 대통령에게 인간적인 섭섭함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고, 대통령이 섭섭해할까봐 안 된다고 과잉충성의 몸짓을 할 생각도 없다”
“3당 합당은 과오다. 그렇다고 과오가 있는 정치세력 모두를 비난만 한다면 나 혼자만 남게 된다. 반대자를 포섭하면서 큰 정치를 이뤄 합리적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후보는 DJ나 YS와의 관계설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불이익이 있어도 DJ를 밟고 서는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과오가 있는 YS와 협력하는 게 지역화합에 도움이 된다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확신에 차 있다.
단체장 선거에 YS 도움 절대적
그러나 이런 원칙론으로 두 김씨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DJ정권 출범에 깊이 관여한 한 교수는 “노 후보는 신민주대연합론과 지역화합론을 토대로 대선 때까지 DJ와 YS를 함께 끌고 가려 한다. 하지만 이 전략은 노 후보 앞날에 중대한 딜레마로 작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근거는 간단하다. ‘노풍’의 원동력은 ‘3김시대’로 상징되는 낡은 정치에 환멸을 느껴온 20∼40대 청장년층의 정치개혁과 변화 욕구다. 반면 노 후보는 3김시대의 핵심축인 DJ·YS와 협력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 놓여 있다. 변화욕구와 정치현실이 충돌하면서 실망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노 후보가 YS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다고 밝힌 이후 노 후보 홈페이지에는 찬반논란이 뜨겁다. 노 후보가 주창하는 민주대연합론과 지역통합 명분을 지지하고 그의 포용력을 칭송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노무현도 결국 더러운 표 때문에 서민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거나 “동서화합의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다”는 비판론이 훨씬 거세다.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반대의견이 70%를 넘어서고 있다.
노 후보 진영도 반발여론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노 후보 쪽에 적극 참여해온 한 의원은 “정치는 현실이다. 일부 비난여론이 있어도 꼭 가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6월 지방선거에서 부산·경남·울산 3곳 단체장 가운데 한곳을 얻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성과가 없으면 재신임을 받겠다고까지 공언했다. 최근 이 구상이 난관에 봉착했다. 울산시장 후보로 고려했던 송철호 변호사는 민주노동당 후보로 확정됐다. 경남은 YS의 심복인 김혁규 현 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추대됐다. 결국 남은 곳은 부산시장 한 자리. 그러나 노 후보가 설득 중인 문재인 변호사마저 부산시장 출마를 고사하고 있다. 민주당 조직국 관계자는 “노 후보는 영남, 특히 경남에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하지만 광역은 고사하고 기초단체장 인선도 만만찮다”고 전했다. 단체장 한 자리도 못 얻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노무현 책임론과 함께 후보 흔들기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다소 부담이 있더라도 YS의 도움을 받아 이런 최악의 상황을 피해야 하다. 노 후보 진영은 YS와 협조하면 부산시장 선거에 여유가 생길 뿐 아니라, 김혁규 지사를 민주당 후보로 영입하는 상황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통령 아들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나
물론 두 사람의 협력을 예단하기 어렵다. YS는 “올 대선에서는 지역화합이 제일 중요하다”며 노 후보 쪽에 우호적인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발벗고 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김혁규 지사가 이미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됐고, 노 후보가 DJ정권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 걸림돌이다. 상도동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YS는 DJ와 일정한 관계절연을 전제로 협력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방안은 노 후보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YS는 상황을 살피며 몸값만 올리고, 노 후보가 끌려다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 노 후보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YS와 협력에 성공해도 득실이 불분명하다. 당장 부산에서 표를 얻을 수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서 표가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노 후보의 핵심 참모들도 견해가 엇갈린다. “6월 지방선거를 위해 YS의 도움이 필요한 만큼 즉각적인 지지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YS에게 연연할 필요 없다”는 의견과 “끌고 당기는 과정이 계속되겠지만, YS도 노무현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계속 공을 들이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노 후보는 YS를 놓고 정치적 도박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DJ와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 노풍에 불을 댕긴 것은 이른바 ‘광주의 선택’이다. 광주경선 승리는 지역화합과 민주당 정권 재창출 열망, 그리고 DJ에 대한 공격을 자제해온 노 후보에 대한 당원들의 신뢰가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그러나 DJ의 아들들이 잇따라 비리 연루 의혹을 받으면서 노 후보도 DJ를 계속 옹호할 수만은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검찰이 엄정하게 조사하고, 대통령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며 정면승부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 후보를 “DJ의 정치적 양자이며 가짜 개혁론자”로 몰아세우면서 영남의 반DJ 정서에 불을 지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가 아직 노무현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아들 비리가 좀더 장기화되고, 노 후보가 지금처럼 계속 머뭇거리면 거센 역풍이 불 수 있다고 진단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대선에서 노 후보의 최대 승부처는 어쨌든 영남이다. 그곳은 반DJ 정서가 강하고, 아들 비리에 더욱 분노하고 있다. 지금처럼 노 후보가 계속 DJ를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경우 영남의 젊은 유권자도 돌아선다.” 민주당 한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그러나 쉽게 차별화를 선언할 형편이 안 된다. 차별화를 공언하는 순간 민주당 안에서 반발이 생겨나고, 호남에서의 지지율 하락도 피할 수 없다.
노 후보는 최근 “집권 뒤 가족과 친인척을 감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DJ에 대한 인간적 배신을 피하면서 제도개선을 통해 자신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효과는 미지수다. 민주당 다른 한 관계자는 “노풍의 실체는 노무현의 독자적 이미지다. DJ와 명확한 차별화가 없다면 노무현도 없다. 노 후보가 과거처럼 전임자를 짓밟고 설 수는 없겠지만 DJ와 분리 선이 명확해지지 않는다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반DJ 정서가 강한 영남 지지율 하락은 물론이고 노 후보의 개혁성에 열광해온 20∼40대 청장년층까지 급속히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놓칠 수 없는 충청표
노 후보 앞날에는 JP라는 복병도 존재한다. 노 후보는 “JP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밝혀왔다. YS는 민주대연합과 동서화합, DJ는 개혁정책의 계승발전론을 내세울 수 있지만 이념과 노선이 완전히 다른 JP와 협력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6월 지방선거와 12월 대선에서 충청표의 향배는 중요하다. 노 후보가 영남에서 압도적 득표가 어려워질수록 가치는 더 커진다. 노 후보는 경쟁자였던 이인제 후보를 설득해 충청권 지지를 이끌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가 노 후보를 지원할 생각이 없다고 거듭 밝혀온 만큼 낙관할 상황이 아니다. 이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JP와 협력하는 상황까지 상정해야 하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민주당 안에서는 “노 후보는 침묵하고, 당 대표 등 당직자들이 공조를 구축하는” 구체적 방안까지 흘러나온다. 특히 4월27일 새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된 한화갑 의원이 JP와 화해에 적극적이다. JP와 화해하는 모습도 노 후보 이미지에 타격을 가할 것이다.
변화욕구가 응축된 노풍을 타고 취약한 입지를 한번에 뒤집고 민주당 대선주자가 된 노무현 후보. 이제 그 앞에는 지난 30년 이상 정치지형을 좌우해온 3김씨라는 현실장벽이 버티고 서 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국힘 40여명, 윤석열 체포 막으러 오늘 새벽 관저 집결한다
‘체포 협조’ 묵살한 최상목, 경호처 증원 요청엔 ‘협조 권고’
한남대로에 등장한 ‘인간 키세스’…“웅장하고 아름답다”
서부지법, 명태균 관련 ‘윤 부부 휴대폰 증거보전’ 청구 기각
계엄날 준비된 실탄 5만7천발…헬기 돌려 특전사도 추가 투입
법원, 윤석열 쪽 이의신청 기각…형소법 110조 미적용도 “타당”
노인단체 시국선언 “윤석열 지킨다는 노인들, 더는 추태 부리지 마라”
공수처, 6일 윤석열 체포 재시도할 듯…압도적 경찰력이 관건
젤렌스키 “가스 운송 중단 결정, 모스크바의 가장 큰 패배”
“나 구속되면 정권 무너져” 명태균 폭로, 윤석열 계엄령 방아쇠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