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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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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의 외길

등록 2002-04-25 00:00 수정 2020-05-03 04:22

민주당 후보 노무현 해부

가난과 싸우던 반항아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

제주 국민경선을 20일 앞둔 지난 2월19일. 여의도 경선캠프에서 만난 노무현 후보는 아주 다급해 보였다. 당 선관위가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 전력 시비를 제기한 그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여론 지지율도 좀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난해부터 이인제 후보를 추격해 곧 뒤집겠다고 장담했는데, 왜 노풍은 불지 않냐고 묻자 거칠게 되물었다. “바람을 만들어야 할 그들이 구경꾼인데…. 내가 도대체 어디서 바람을 만들라는 말이오.” 개혁성향 의원들조차 자신의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현실 앞에 낙담하고 지쳐 있었다. 스스로 다짐하듯 그는 말을 이었다. “정치, 왜 해요? 시류에 편승해 금배지 하나 달고 적당히 누리자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투신하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투신하다 깨지면, 의미 있고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다음 사람이 투신하고 또 투신하고 투신하고….”

그로부터 두달. 그는 국민경선을 통해 협소한 입지를 뒤집고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는 저력을 보였다. 주말연속극 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정치인 노무현의 도전을 무모하다고 말해왔다. 보통 부산사람 눈에는 ‘덩크슛’ 한방 정도로 보일 3당 합당을 거부한 채 자신을 발탁한 YS를 “변절자”라 공격하며 DJ 깃발을 들고 부산으로 달려가고, 모든 정치인들이 피해가는 와 정면승부를 계속하는 모습.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란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신이 뚜렷하다. “가능성 있는 도전, 또는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분명히 하겠다.”

가난에 대한 열등감과 유년기의 반항

그의 삶의 궤적엔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 실패, 극적인 반전이 뒤섞여 있다. 그는 1946년 8월 경남 진영읍 봉화산 자락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순례씨는 당시 41살, 이미 4남매를 두고 있었다. 그는 ‘돌콩’으로 불렸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탓이다. 그러나 제법 똑똑했다. 여섯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1등을 도맡았다. 중학 2학년 때는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씨가 한국 최초로 만든 부일장학회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거친 반항아였다. 자존심과 우월의식도 무척 강했다. 초등학교 4학년, 반장이던 그는 누이가 물려준 찌그러진 필통이 창피스러워 어리숙한 짝을 꼬여 새 필통과 맞바꿨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시켰고 결국 필통을 되돌려주는 수모를 겪었다. 공인으로서 도덕성에 관한 첫 심판이었다. 6학년 때는 교내 붓글씨대회에서 2등을 하자 상을 반납하는 당돌함을 보였다. 잘못 쓴 것 같아 다시 쓰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종이를 바꿔주지 않아 그냥 제출했다. 그런데 옆반 시험장에서는 종이를 바꿔줬고, 그 아이가 1등을 한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중학 시절 반항아 기질은 한층 강하게 나타난다. 진영중학교에 시험을 치른 그는 입학금이 없었다. 친구로부터 ‘입학 때 책값만 내고 봄 농사를 지어 갚기로 하고 입학허가를 받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교감을 찾아갔다. 교감은 농사나 배우라며 거절했다. 서럽고 분한 마음에 눈물만 떨어뜨리는 어머니. 그는 그 자리에서 입학원서를 북북 찢었다. 그리고 “가요! 이 학교 아니면 학교가 없나” 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우여곡절끝에 입학은 했지만 1년 만에 또 일을 저질렀다. 4·19혁명의 씨앗인 3·15선거가 임박한 60년 2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을 거부하고 백지원고지를 내자고 선동했다. 미운털이 박힌 그는 1주일 정학을 당했다.

고지식할 정도의 원칙주의, 거침없는 도전, 파문에 휩싸이면서도 계속되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언행들. 노무현을 형용하는 이런 기질들은 어린 시절부터 발현되고 있었다.

방황의 나날 부산상고. 그리고 출구 없는 고졸인생

가난 앞에 그는 조숙했다. 중3 때 이미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남몰래 5급(현재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큰형의 강권에 이끌려 부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른다. 장학금과 졸업 뒤 은행취직이 보장된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교 시절은 방황의 나날이었다. 농땡이 치고, 머리를 안 깎으려 시험시간에 도망을 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성적도 중간 수준. 졸업 뒤 농협에 취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친구 3명과 함께 학교에서 추천해준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취직했다. 한달 월급 2700원. 하숙비도 안 되는 급료 앞에서 그는 고졸인생의 앞날과 한계를 절감하고 한달 반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고시를 통한 수식적인 신분상승을 꿈꾼다.

고향 산비탈에 직접 토담집을 짓고 ‘마옥당’(磨玉堂)이라 이름붙였다. 고졸 출신인 그는 먼저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치러야 했다.(당시 고졸출신은 시험자격이 없었음) 그러나 은행에 취직할 것이라 자랑하던 어머니 체면은 완전히 구겨졌고, 적잖이 눈칫밥도 먹었다. 결국 동네 친구들과 울산 노동판에 뛰어든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한창 건설 중인 한국비료 공사장. 일당 180원, 하루 세끼 밥값 105원을 제하면 75원 벌이였다. 다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삶은 팍팍했다. 이때 소설 같은 일들이 전개된다. 한창 돈벌 궁리를 하던 그는 작은형 건평씨와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김해 농업시험장에서 감나무 묘목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묘목을 싸들고 온 신문지에서 예비시험 공고를 본 것이다. 다시 공부에 전념해 4개월 만에 예비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책값을 벌려고 다시 찾은 공사판. 떨어진 목재에 얼굴을 맞고 이빨이 3개나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 68년 입대한다.

사법고시 합격,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다

71년 제대하고 돌아오자 집안 형편이 좀 피었다. 두 형이 잇따라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그해 4월 공부를 시작했지만 보기좋게 낙방했다. 마을 처녀 권양숙씨에게 마음을 빼앗긴 때문이다. 잡념을 떨치려 한동안 절에 들어가 ‘수석합격’이라는 표어까지 내걸고 정진했지만 허사였다.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친다. 이번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불거졌던 권씨 아버지의 좌익활동 경력이 문제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연좌제에 걸려 임용이 안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 앞에 눈먼 그는 “물불 안 가리고” 밀어붙였다. 73년 1월 결혼에 골인해 그해 5월 아들 건호를 낳았다.

결혼은 고시공부에 도움이 됐다. 당시 그와 권씨는 판검사, 변호사가 되면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나게 살자고 다짐했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대를 개발해 실용신안 특허 출원을 내는 여유도 보였다. 75년 17회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고졸 출신인 그의 합격은 당시에도 화제였던 모양이다. 그는 75년 7월호에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는 장문의 합격기를 썼다.

부끄러운 초임 판사, 변호사 시절

처음부터 전문 변호사를 꿈꿨지만 가족과 아내를 의식한 그는 임용이 안 됐다는 의심을 받을까봐 판사에 지원한다. 첫 임용지는 대전지방법원. 그러나 단조로운 판사 생활에 큰 흥미를 못 느꼈고, 별로 훌륭한 법관도 아니었다. 고백 에세이 (1994, 도서출판 새터)에서 그는 “당시 잘못된 분위기에 휩쓸려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니는 등 부끄러운 짓도 많이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1년도 못 채우고 판사직을 내던졌다.

78년 5월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는 데 골몰했다. 개업 직후 부끄러운 기억들도 숨기지 않는다. 사건수임 계약금을 반환하지 않기 위해 당사자 간에 합의가 가능한 사건을 서둘러 처리하고, 법원과 검찰 직원들에게 알선 커미션을 건네고, 판검사들에게 술을 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렸고, 82년에 후배인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하면서 커미션까지 완전히 끊었다. “새로 시작하는 후배 앞에서 차마 추한 꼴을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 그리고 변신

81년 인생을 바뀌놓는 ‘부림사건’과 마주한다. 57일 동안 경찰에 구금돼 고문당한 학생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 시커멓게 죽은 그들의 발톱을 본 그는 돈벌고 요트를 취미로 즐기던 별 생각 없는 변호사 생활을 마감한다. 이후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으로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났고, 85년 송기인 신부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아예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87년 9월, 노동자 대투쟁 때 최루탄에 맞아 죽은 이석규씨의 사인규명 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다. 그러나 곧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88년 4·26총선(13대)을 앞둔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5공 실세 허삼수의 저격수로 그를 전격 영입한다. 그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영입’으로 보상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말해왔다.

무모한 도전과 반전이 거듭된 정치역정

행운은 한동안 지속됐다. 금배지를 단 그는 88년 11월7일부터 단 사흘 동안 열린 5공특위 일해재단청문회를 통해 스타로 떠오른다.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일해재단 성금의 강제성을 증언해주면서 신군부에 돈을 빼앗긴 피해자로 조명받았다. 국회의원들은 그런 정 회장을 깍듯이 예우했다. 그러나 그는 정 회장을 시류에 영합해 정경유착으로 이익을 챙기고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인물로 몰아세웠다. 한풀이를 원했던 국민은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곧 위기가 닥친다. 89년 3월17일 여당인 민정당이 5공청문회 참석을 거부하자 의원직을 내던졌다. 격려가 잇따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역풍이 불었다. 그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내몰려 고립됐다. 17일간의 잠적 끝에 당 지도부에 이끌려 국회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는 ‘잔인한 봄날’로 기억하며 “정치를 너무 순진하게 봤다”고 회상한다.

90년 1월 3당 합당이 시작되면서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다. YS는 신사고를 부르짖었고, 대다수 의원들이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며 뒤따랐다. 그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김정길, 이철 등과 함께 또 의원직을 내던졌다.

정말 춥고 배고픈 시절이 시작됐다. 92년 총선에서 허삼수씨와 다시 맞붙었지만 “노무현을 밀면 DJ가 대통령이 된다”는 부산정서 앞에 무릎꿇어야 했다. 95년 부산시장, 96년 총선도 패배였다. 98년 서울 종로보선에서 어렵사리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4·13총선 때 “지역구도 극복”을 내걸고 다시 부산으로 향한다. 참모와 가족들 모두 말렸지만 그는 고집스러웠다. 이번에 밀어주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에게 무참히 꺾였다. 바보처럼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은 그에게 네티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노사모를 결성해 열성적인 지지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정치적으론 위기에 몰렸다. 그의 영남 득표력은 더욱 의심받았고, 모두들 2002년 대선을 이회창과 이인제씨의 맞대결 구도로 전망했다.

그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왔다. 2001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장관시절 그는 조직의 리더로서 행정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중량감있는 대선후보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민주당 국민경선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 노무현의 반전은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였다. 그는 기자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 되기가 어려워 그렇지 후보만 되면 이길 수 있다”고 외쳤지만,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애달픈 독백처럼 들렸다. 그러나 두달 동안 상영된 국민경선이라는 주말연속극은 ‘바보’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물론 그의 영광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노무현 자신의 말마따나 “삶 속에는 성공과 실패가 언제나 하나였고, 패배는 승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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