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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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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된 선거법

‘무늬만’ 연동형 비례제로 거대정당·지역구 의원 출혈 최소
등록 2019-12-30 13:17 수정 2020-05-15 20:22
문희상 국회의장이 2019년 12월23일 회기 결정 안건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무제한 토론을 거부하고 회의를 진행하자, 이주영 국회부의장(문 의장 왼쪽)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희상 국회의장이 2019년 12월23일 회기 결정 안건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무제한 토론을 거부하고 회의를 진행하자, 이주영 국회부의장(문 의장 왼쪽)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①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100석(연동률 100%)

②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의석수 현행 300명에서 360명으로 확대

③ 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연동률 100%)

④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47석 중 30석에만 연동률 50% 적용)

1년 혼란 무색… 전 의석 중 10%만 연동률 50%

①~④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 과정에서 주되게 다룬 ‘안’이다. ①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5년 ‘연동형 비례대표제’(연동형 비례제)의 한 종류인 ‘권역별 비례대표제’(비례대표를 권역별로 나눠 뽑는 것) 도입을 국회에 권고하면서 내놓은 안이다. ②는 2019년 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연동형 비례제 도입과 의석수 확대를 권고하며 내놓은 제안이다. ③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4월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한 선거법 개정안이다. ④는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이 최종 합의해 자유한국당의 반발을 뚫고 12월27일 국회 본회의에 통과시킨 선거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으로 21대 총선에 적용된다. ‘준연동형 비례제’라고 한다.

지난 1년 동안 복잡한 용어와 계산식이 난무하며 혼란을 줬지만, 애초 선거제도 개혁의 취지는 간명했다. 비례대표 의석수를 확대해 비례성(유권자의 표가 실제 의석으로 반영되는 정도)을 늘리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거대정당(민주당·한국당)의 의석수 감소와 지역구 의원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확보된 의석수가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데 활용되기 때문이다. 개혁의 취지를 살리려면 ①, ②, ③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지만 여야가 선택한 것은 결국 ④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수를 현행 그대로 유지하고 비례대표 30석 안에서만 비례성을 보장(연동률)한 것인데, 거대정당은 의석수 감소로 인한 출혈을 최소화하고 기존 지역구 의원들도 크게 손해 보는 것이 없다. 호랑이를 그린다고 했지만 고양이를 그린 것이다. 물론 그동안 과소 대표된 중소정당의 득표율을 좀더 의석에 반영한 데는 의미가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소선거구-단순다수대표제’에 의한 양당 구도도 다소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시킨 ‘무늬만’ 연동형 비례제는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유권자에게 선거제도란 투표를 의석으로 전환하는 ‘규칙’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주권자(국민)가 대표(국회의원)를 뽑아 자신의 권한을 넘겨주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 요구는 단순히 국회의원 뽑는 방식을 바꾸는 것을 넘어 주권자와 대리인의 거리를 좁히려는 것으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열망이 담겨 있다.

비례대표 확대는 오래전부터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선거제도 개혁의 대안으로 꼽혔다. 지역구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을 의원으로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도가 유권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공감대가 컸기 때문이다. 갈수록 계층·성별·세대 등으로 사회 갈등의 양상이 다양해지는데 ‘지역주의’에 기반한 한국의 정당이 이를 받아안지 못한다는 비판도 계속됐다. 2004년 17대 총선부터 지역구 의원에게 한 표를 던지고 정당에 한 표를 던져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1인2표제’를 도입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첫걸음이었다. 지역구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사회가 처한 다양한 갈등을 받아안으라는 역할을 비례대표 의원에게 맡겼다. 각 정당은 ‘보여주기’식에 그치더라도 여성·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청년·노인 세대별 대표, 직능 단체 대표들을 비례대표 후보에 공천했다.

연동형 비례제, ‘사표’ 막을 대안인데

그럼에도 총선 때마다 ‘사표’(死票) 논란이 계속 불거지자, 학계와 시민사회 중심으로 독일식 연동형 비례제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유권자의 표가 의석에 반영되지 않은 ‘사표율’은 총선 때마다 50%를 육박했다. 20대 총선에서 전체 지역구 선거 1등 당선자들이 얻은 표는 총 1176만979표(48.28%)였지만, 의석에 반영되지 않은 사표는 1225만8430표(50.32%)로 집계된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의당을 예로 들면, 20대 총선에서 득표율(정당득표율 7.78%)에 비례하는 정의당의 의석수는 23석(300석×7.78%)이지만 현실은 6석(지역구 2석+비례 4석)이다. 한국당의 텃밭인 TK(대구·경북)에서 다른 정당을 찍거나(호남에서 민주당 계열이 아닌 정당을 찍거나), 거대정당 대신 중도·진보 소수정당에 던진 표에 담긴 ‘민심’을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연동형 비례제’ 도입 요구로 연결됐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을 통해 광장에서 분출된 다양한 목소리를 정치가 대변하려면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힘을 받았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의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주권의 재구성’(<현대정치연구> 2019년 봄호) 논문은 “(선거제도 개혁 논쟁의 핵심은) 촛불 이후에 국민주권의 대표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연동형 비례제의 기본 뼈대는 정당의 득표율만큼 의석수를 배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당득표율 20%인 ㄱ정당이 선거에서 얻어야 할 의석수는 60석인데(300석×20%), 실제 지역구 당선자 수는 50석에 그칠 경우 부족한 10석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의원수 증가를 야기한다. 각 정당의 득표율대로 의석을 보장할 경우 300석이 넘는 초과 의석이 생길 수 있는데, 독일에선 이를 허용한다.

그러나 여야는 국민 여론이 의원 정수 확대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300석 안에서 연동형 비례제를 설계하겠다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논의를 시작했다. 첫단추를 300석으로 끼우다보니 의석수를 두고 거대정당, 소수정당, 지역구 의원 사이에 ‘제로섬게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는 현실화됐다. 야당 시절과 대선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장했던 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현행 선거제도 유지를 원하는 한국당은 아예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지역구 통폐합 가능성이 높은 호남 의원들은 “지역구 감소는 안 된다”고 나왔다.

선거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에서 무제한 토론이 사흘째 이어진 12월25일, 주승용 국회부의장이 피곤한 듯 눈 주위를 만지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선거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에서 무제한 토론이 사흘째 이어진 12월25일, 주승용 국회부의장이 피곤한 듯 눈 주위를 만지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비례 75→50→47 줄고, 그중 30석만 연동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통과를 위해 야당 설득이 필요했던 민주당은 소수정당의 선거제도 개혁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4+1’ 협의체를 만들어 선거법·공수처법 개정안 통과를 동시에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패스트트랙 당시 설정한 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은 250 대 50, 253 대 47로 계속 바뀌었다. 47석 비례대표 의석마저 30석에만 연동형 비례제를 운영하기로 축소했다. 민주당은 선거제 개혁에 반발하는 한국당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오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입장이지만 결과적으로 민주당·한국당, 지역구 의원들의 ‘손해’는 크게 줄었다.

여야 모두 내부에서 “선거법이 누더기가 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역주의 완화를 이유로 석패율제(한 후보자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 출마하는 것을 허용하고, 가장 높은 득표율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선출하는 것)에 찬성했던 민주당은 논의 막판에 ‘석패율제는 중진 의원 구하기’라고 말을 뒤집으며 정의당·민주평화당 등의 요구를 묵살하기도 했다.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 입장에서는 연동형 비례제 출발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일찍부터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주장하며 국회를 압박했던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국제정치학)는 “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기보다는 소수정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선에 머물렀다. 선거제도 개혁 의지가 약했다”고 꼬집었다. 물론 제1야당인 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보이콧'으로 일관한 가운데 이정도 합의를 하는게 쉽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민주당이 다소 손해를 감수하고도 논의 틀을 깨지 않고 이끌어 왔기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이 가능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선거제도 개혁이 대의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한다는 큰 명분이 일정 정도 사라지고 기존 제도를 뜯어고친 선에 머무르다보니 남은 건 ‘정치공학적 계산’과 ‘꼼수’다. 각 정당은 21대 총선에서 유불리를 따지고, 언론은 의석수 전망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21대 총선에 적용될 준연동형 비례제는 3% 이상 득표한 정당 가운데 득표율만큼 의석을 못 얻은 정당에 비례대표 30석 안에서 의석을 나눠준다. 나머지 비례대표 17석은 기존과 같이 정당득표율대로 각 당에 배분한다. 즉 지역구 당선자가 많을 민주당과 한국당은 30석 안에서 비례대표 의석을 받지 못하고 바른미래당, 새로운 보수당, 정의당, 그리고 새롭게 창당될 군소정당이 30석을 나눠가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존재하는 정당과 지지율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민주당과 한국당은 한 자릿수에서 의석 증가가 예상되고, 정의당은 현행 6석에서 6~7석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국회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원내 교섭단체(20석 이상)가 민주당·한국당 외에 나올지는 불투명하다. 물론 이는 실제 총선 결과와 거리가 먼 ‘가정’일 뿐이다. 유권자가 2020년 4월에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처럼 투표할 가능성은 없고, 정당 구성도 지금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선거제도 개혁에 반발하는 한국당은 지역구 출마 없는 비례대표 전용 ‘비례한국당’(가칭)이라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연동형 비례로 배분되는 30석의 일부를 가지겠다는 ‘꼼수’를 공식화했다. 민주당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만 내부에선 “우리도 비례민주당을 만들어서 의석을 확보해야 하지 않나”라는 의견이 흘러나온다. 지역구는 기존 당에서, 비례대표는 ‘자매 정당’에서 의석을 가져오겠다는 발상이다. 제도를 바꾸자마자 이를 무력화하는 꼼수부터 꺼내든 것이다.

최태욱 교수는 정치권에서 선거제 개편이 온전히 합의되지 않은 채 꼼수가 거론되는 것에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이유는 정치 변화로 사회경제적 개혁 효과를 가져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선거제 개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집단들의 목소리가 입법과 정책에 반영되는 게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이는 정치 행위자들의 선거 참여 유인 효과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소상공인, 비정규직 청년들이 정치세력화를 꿈꾼다면 ‘당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당에 투표하세요. 사표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하며 유권자를 유인하면 되는데 지금 제도는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소수정당 국회 문턱은 낮아져

이관후 연구위원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왜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는지, 기존 대의민주주의를 개선하기 위해 대표 선출 방식의 변화가 필요한지 등의 질문에서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출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각 당의 이전투구로 흘렀다. 국민이 새로 바뀐 제도를 실감할지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새로운 선거제도가 누구도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다당제와 협치의 길을 열 것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소수정당에 높기만 한 국회 문턱을 낮춘 것도 ‘일보 전진’이다. 물론 이마저도 거대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들 경우 선거제도 개혁은 도루묵이 될 가능성이 크다. 꼼수가 난무할 때 필요한 것은 ‘정공법’이다. 선거의 정공법이란, 정당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과 정책을 내세우고, 유권자는 자기 목소리를 대변할 정당과 인물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는 역대 총선이 언제나 줬던 ‘교훈’이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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