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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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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저제나 조현천만 기다리는 검찰

15개월 만에 새로운 계엄문건 공개됐지만 수사는 여전히 ‘중단’ 상태
등록 2019-11-02 06:08 수정 2020-05-02 19:29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가운데)이 10월2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무사 계엄령  문건’ 관련 제보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 기자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가운데)이 10월2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무사 계엄령 문건’ 관련 제보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신소영 한겨레 기자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작성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계엄문건)이 지난해에 이어 최근 추가로 공개됐다. 이번 문건은 지난해 공개된 문건의 뼈대가 된 ‘원본’으로 추정된다. 두 문건의 존재는 박근혜 정부에서 계엄이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인용 기각을 전제로 수정·보완 등 단계를 밟으며 ‘구체적인 실행안’으로 검토됐다는 정황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계엄문건 작성과 관련해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고, 문건 작성을 지시한 ‘윗선’은 드러나지 않았다. 계엄문건 작성의 ‘열쇠’를 쥔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해외로 도피해 수사할 수 없다는 검찰 ‘입장’만 반복 재생되고 있을 뿐이다.

이전 문건보다 12일 먼저 작성

군인권센터(센터)가 10월21일 공개한 계엄문건 ‘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대비계획)은 지난해 7월 센터와 청와대 등을 통해 공개된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수행방안) 대비계획 세부자료 문건의 이전 버전이다. 대비계획은 헌법재판소의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2017년 3월10일)를 보름여 앞둔 2017년 2월22일 작성됐고, 수행방안은 3월6일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공개된 수행방안에는 위수령·계엄선포·계엄시행 단계별로 서울 광화문·여의도 군부대 배치, 국회·언론 통제 방안 등 구체적인 계엄 실행안이 담겨 있어 충격을 줬다. 해당 문건에 ‘태극기 세력’의 반발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전제가 담겨 있긴 했지만, 문건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기각될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촛불’을 짓밟겠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계엄령 문건 관련 의혹 군검 합동수사단’(합동수사단) 조사에서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은 “계엄문건 작성을 지시하지도 보고받지도 않았다”(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 “검토 차원이었다”(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고 진술하며 문건과의 관련에 선을 긋거나 “실행 계획이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센터가 공개한 대비계획과 검찰의 ‘불기소 이유 통지서’(센터·참여연대 등이 김관진·조현천·한민구·황교안·박근혜 등을 ‘내란 음모’ 등 혐의로 고발한 것에 대해 검찰이 이들을 참고인 중지, 기소 중지한다며 보낸 통지서)를 종합해 살펴보면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기소 이유 통지서’에서 검찰이 현재까지 확인한 계엄문건 작성과 관련된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직함 생략)

① 김관진은 2016년 10월께 국방비서관실 행정관에게 ‘북한 급변 사태’를 가정해 계엄 선포 등을 검토시켰다. 김관진이 보고받은 방안들은 계엄문건과 일부 유사한 측면이 있다.

② 기무사는 2016년 11월3~4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국면별 대비 방안’ 등 3건의 문서를 작성했고, 이 문서에 ‘계엄 선포’가 언급돼 있다. 이 문서는 조현천과 소강원(전 기무사 참모장)에게 보고됐다.

③ 조현천은 2017년 2월10일 청와대에서 김관진을 만나고, 2017년 2월17일 한민구를 만났다.

④ 이후 조현천의 지시에 따라 기무사에서 ‘미래 방첩수사 업무 체계 발전 방안 연구’라는 위장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해 2월17일부터 3월3일까지 계엄문건을 작성했다.

⑤ 조현천은 2017년 2월28일 육군 20사단장, 3월27일 육군 8사단장을 만났다. (두 사단은 계엄문건에 계엄 임무 수행군으로 편성돼 있다.)

⑥ 조현천은 2017년 3월3일 국방부에서 한민구에게 계엄문건을 보고했다.(지난해 7월 공개된 문건)

검찰이 확인한 사실만 봐도 탄핵과 촛불 국면에서 한민구 전 국방장관-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계엄 주체인 합동참모본부를 배제하고) 계엄문건 작성을 주도한 정황이 드러난다. 김관진 전 안보실장이 연루된 정황도 보인다.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

공개된 두 계엄문건은 ③~⑥의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수정·보완되고 구체화했다. 2월에 작성된 대비계획은 첫 장 ‘現(현) 상황 평가’에서 “현행 계엄계획은 평시보다 전시 상황에 맞춰 개념 위주로 작성되어 있어 現 시국에 적용하는 데 다소 제한”이라고 서술돼 있다. 이 문건에는 계엄 실행 여부만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국가비상사태 조기 안정화를 위한 비상계엄 선포 필요성 대두”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3월에 작성된 수행방안 첫 장에서는 “현행 계엄 계획은~”이란 문장이 빠지고 “일부 보수 진영에서 계엄 필요성 주장하나, 국민 대다수가 과거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어 계엄 시행시 신중한 판단 필요”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또 “北(북)의 도발 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서 시위 악화로 인한 국정 혼란이 가중될 경우 국가안보에 위기가 초래될 수 있어, 군 차원의 대비 긴요”라고 계엄의 필요성을 ‘국가비상사태 조기 안정화’에서 ‘안보상의 이유’로 수정했다.

3월(수행방안) 문건에는 2월 문건과 달리 계엄보다 실행이 쉬운 위수령(2018년 9월11일 폐지) 발령 검토안이 추가됐다. “국민들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하여 대응하고 상황 악화시 계엄(경비→비상계엄) 시행 검토”라는 제언도 담겼다.

센터와 함께 계엄문건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온 군법무관 출신 김정민 변호사는 “(사건 관련 제보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2월에 계엄령을 위주로 보고서를 올리자 조현천 전 사령관이 ‘위수령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문건 작성 추이를 보면 계엄으로 바로 가기 부담되니 합법을 가장한 위수령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위수령은 국회 동의 없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대통령령으로 그동안 위헌 논란에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기무사가 ‘위수령 카드’를 꺼낸 것은 탄핵 찬반 집회에서 폭력이 발생할 경우 바로 군부대를 투입해 계엄으로 가려는 구상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김정민 변호사는 “위수령으로 ‘스파크’를 일으켜 계엄 선포의 충분조건을 만들려 한 것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국방 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도 “여러 번 문건을 작성하며 업그레이드했다는 것은 실행을 염두에 둔 정황이 짙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회적인 아이디어 차원의 검토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 있던 황교안 대행은 알았을까

검찰은 조현천 전 사령관의 진술을 들어봐야 진상이 파악된다는 이유로, 김관진·한민구·황교안·박근혜 등의 ‘피의자’들에 대해 ‘참고인 중지’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중단했다. 하지만 센터는 10월29일 기자회견에서 검찰 조사를 받았던 제보자들의 주장을 토대로 “조현천 전 사령관은 (한민구 전 국방장관 지시 전인) 2017년 2월10일에 계엄문건 작성 지시를 내렸다. 이날은 조 전 사령관이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을 만난 날이기도 하다. 계엄령문건의 발단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의 청와대에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계엄령의 ‘계’ 자도 못 들었다”고 계엄문건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나머지 관련자들도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조현천 전 사령관 신병 확보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에 센터와 시민사회단체들은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봐도 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는데 검찰은 주요 피의자들을 1년 이상 방치하고 있다. 검찰이 계엄문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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