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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이 만든 법안 국회 발의됐다

‘진주참사방지법’ 국회 접수… 동료지원가 채용 근거 담아
등록 2019-10-30 17:13 수정 2020-05-03 04:29
‘진주 참사’를 일으킨 안아무개(42)씨가 윗집 대문에 오물을 뿌리는 모습. 안씨에게 위협을 느낀 주민들은 여러 차례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안타까운 인명사고로 이어졌다. 경남지방경찰청 제공

‘진주 참사’를 일으킨 안아무개(42)씨가 윗집 대문에 오물을 뿌리는 모습. 안씨에게 위협을 느낀 주민들은 여러 차례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안타까운 인명사고로 이어졌다. 경남지방경찰청 제공

“이 법안(진주참사방지법)이 통과되는 걸 보기 위해 10년을 기다렸습니다. 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이정하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대표)

정신장애인이 주도적으로 논의해 법안을 구성한 ‘진주참사방지법’(정신건강 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의 대표 발의로 10월15일 국회에 접수됐다. 정신장애인이 직접 만든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어 논의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제1261호 ‘정신장애인, 법 철조망을 가르다’ 참조).

정신장애 회복한 선배가 멘토 역할

법안 구성에 헌신적으로 참여했던 이정하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이하 파도손) 대표는 법안 통과를 위해 국민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 대표는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사는 한국 정신장애인들의 삶과 자립을 위해 중요한 내용을 담아 발의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가족, 관련 단체의 지지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은 제2조 7항에서 “정신질환자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에 관한 사항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며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 조항은 구호에 그쳤다. 정신장애 당사자는 자신들과 관련된 법률과 제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배제됐고 수동적 위치에 머물렀다.

당사자들은 이번에 발의된 진주참사방지법에서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정신장애인 동료지원가 채용 근거를 마련한 부분을 핵심으로 꼽았다. 동료지원가는 정신장애를 먼저 경험하고 회복한 ‘선배’로, 다른 동료 장애인의 회복을 돕고 멘토 역할을 한다. 정신장애인이 유사한 경험을 한 동료와 연대해 자기주도적으로 회복해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미국, 캐나다, 영국 등 국제사회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는 동료지원사업 실시로 3개월 동안 정신장애인의 병원 입원기간을 단축하고, 수천만원의 의료비용을 절감하는 등 정신장애 회복 관련 긍정적 효과도 보고됐다.

정신재활시설에 쉼터 추가

진주참사방지법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설치·운영 내용을 규정한 정신건강복지법 제15조에 9항을 신설해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정신질환을 치료하고 회복한 사람으로서 정신질환자 동료에 대한 상담 및 교육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하는 교육을 이수한 자(동료지원가)를 채용할 수 있다”고 정했다.

한국은 지난해 10월부터 시범사업으로 동료지원가를 지원했는데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이정하 파도손 대표는 10월23일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한 결과 서비스를 받는 정신장애 당사자의 만족도뿐만 아니라 동료지원가의 자존감도 높일 수 있었다. 진주참사방지법이 통과되면 정신건강복지센터가 동료지원가를 고용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고 재정도 편성할 수 있다. 정신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해 자립을 돕고, 자립한 당사자가 다른 장애인을 돕는 선순환을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정신장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현재 시범사업으로 운영하는 ‘절차보조서비스’의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절차보조서비스는 정신장애인의 입원부터 퇴원 이후까지 지원하는 서비스로 동료지원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동료지원가는 자신의 회복 경험을 공유하고 정신장애인이 시설에 입원할 경우 통신, 면회 등 보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했다.

진주참사방지법은 정신재활시설에 ‘정신장애인 쉼터’를 추가했다. 쉼터는 강제입원이 필요한 응급상황이 아닌 경우 당사자가 방문해 안정을 취하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일부 의료계에선 “병원이나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다른 시설과 역할이 중복된다”고 지적했지만,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병원은 중증일 경우에 가는 곳이고, 쉼터는 일상적으로 불안 증상이 나타날 때 부담 없이 방문해 다른 정신장애인과 공감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역할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개정법률안은 정신응급대응체계를 구축할 책임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있다고 못박았다. 지난해 말 중증 정신장애인에게 목숨을 잃은 임세원 교수 사건과 지난 4월 경남 진주에서 중증 조현병 환자에게 5명이 목숨을 잃은 진주 참사의 원인으로 ‘응급상황에 놓인 정신장애인에 대응해야 할 책임소재’가 명확하지 않은 점이 지적된 것을 반영했다. 응급상황에 처한 정신장애인을 보고받은 경찰과 119 구급대원의 역할도 더욱 구체적으로 정했다.

본회의 통과 남아 이제 첫발 뗀 셈

4월 정신장애인들이 직접 만들어 국회에 제출한 진주참사방지법은, 7월 국회에서 열린 공청회를 거치면서 일부 수정됐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보건복지부 등 관련 기관과 단체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당사자 중심의 법안 마련 과정을 돕는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호의무자 동의 조항 삭제 등 초안에서 몇 가지 빠진 내용도 있지만 정신장애 당사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꼭 필요한 내용이 담겼다고 판단했다. 보건복지부 당국도 논의해 이 정도에서 합의할 수 있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발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 교수는 “진주참사방지법이 국회 논의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지만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만든 법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들은 고무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장애인들은 임세원 교수 사망 사고와 진주 참사 이후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주체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11월7일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전국 단위 대회를 연다. 이 행사는 특히 대니얼 피셔 교수의 참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피셔 교수는 수차례 입·퇴원을 반복한 조현병 환자였지만 하버드대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친 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가 됐고, 현재 미국의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인 전국역량강화센터(NEC)를 이끌고 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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