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9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김대년 사무총장실을 4명의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사람들이 찾았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콩고인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인 ‘프리덤 파이터’의 대표단이었다. 대표단은 김대년 사무총장에게 “한국 기업이 DR콩고에 터치스크린 투표시스템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부정선거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 선관위가 DR콩고 선거위원회(CENI)에 시스템 도입을 하지 말라고 권고해달라”고 말했다. 앞서 이들은 12월23일 치러질 DR콩고 대통령선거에서 한국 기업인 미루시스템즈(미루)의 투표시스템 사용이 결정되자 미루와 중앙선관위, 법무부, 국회,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에 반대 입장의 청원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김대년 사무총장은 “DR콩고 대선 정국에 심한 우려를 표명한다. CENI와 한국 기업 간의 계약이지만 DR콩고 선거에 우리 위원회가 개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답했고, 선관위는 이를 보도자료로 냈다. 그러자 이번엔 DR콩고 대사관에서 9월3일 “한국 중앙선관위가 언론사에 제공한 보도자료에 대해 매우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9월2일 한국을 찾은 코르네유 낭가 CNEI 위원장이 직접 9월4일 기자회견도 열 예정이다. 콩고 대사관은 보도자료에서 “한국에서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이 이번 선거를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밝혔다.
DR콩고 시민단체의 항의
DR콩고 대선은 국제사회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현 조제프 카빌라 대통령이 2016년 말 임기를 마치고도 대통령직을 내놓지 않아 17년째 장기 집권이 이어지면서 퇴진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로 1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전 DR콩고를 다녀온 한 관계자는 “현지 교민들은 불똥이 엉뚱하게 한국 사람들에게 튈까봐 걱정하는 분위기다”라고 전했다.
아프리카 국가인 DR콩고 대선에 왜 한국 기업의 전자투표시스템이 논란이 되는 것일까. 그 중심에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있다. 세계선거기관협의회는 선관위 주도로 2013년 10월14일 출범한 민간기구로, 선관위 사무총장(2014년 11월~2016년 11월)을 지낸 김용희씨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세계선거기관협의회 쪽은 “후발 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선거 체제 정착 지원, 각국 선거관리기관의 역량 강화와 선거 이해당사자들 간의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밝힌다. ‘선거 한류’를 목표로 설립된 것이다. 세계 106개 국가가 참여하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는 선관위와 별도의 기구지만 사실상 선관위의 예산 지원(ODA 예산 등)과 통제를 받고 있다.
DR콩고 투표시스템 도입 논란이 불거지자 김대년 사무총장은 세계선거기관협의회의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내부 감사한 뒤 입찰 방해,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김용희 전 사무총장을 지난 3월 수사 의뢰했다. 현 사무총장이 전 사무총장을 수사 의뢰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한국 기업의 투표시스템이 국제적 논란의 중심에 서고 전·현직 사무총장이 충돌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DR콩고에 투표시스템이 도입되는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2016년 3월 세계선거기관협의회는 CENI와 전자 투·개표 장비의 개발과 보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김용희 전 사무총장은 “CENI 위원장이 미국과 캐나다 등의 투표기 회사를 물색하다 한국까지 와서 ODA 사업으로 추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코르네유 낭가 CENI 위원장의 외신 인터뷰와 관련 보도를 보면, DR콩고에선 유권자 4600만 명에 200여 종족으로 240여 개 언어를 쓰기 때문에 투표 용지만 53쪽에 달해 비용을 절감하고 제때 선거를 치르려면 전자투표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밝힌다. 하지만 DR콩고 내부 야당과 일부 시민들이 전자투표시스템을 도입하면 부정선거가 치러질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권자 문맹률이 높고, 정보기술(IT) 기기 사용 경험이 없는데다 전력 인프라도 부족해 전자투표시스템 도입이 선거 조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우려한 외교부는 2016년 5월 투표시스템 사업을 탈락시키고, 유권자명부시스템 개선과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에만 9억3천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김용희 전 사무총장의 무리한 알선
그런데 선관위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낸 내부 감사자료(2018년 1~2월)를 보면, 김용희 전 사무총장이 ODA와 별개로 CENI와 미루 사이의 1700억원 계약(투표시스템 10만6천 대)을 알선했다고 나온다. 미국·벨기에·프랑스 등이 우려를 표하자 김 전 사무총장이 2017년 11월 DR콩고로 가 서구 외교 관계자들에게 투표시스템의 도입 필요성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니키 헤일리 유엔 미국대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공식 회의에서 DR콩고의 전자투표시스템 도입 반대 의견을 내고 종이투표를 촉구했다는 프랑스 《AFP》 보도가 나오는 등 주변국들이 꾸준히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사무총장은 “1700억원대 사업이면 다른 나라에서 눈에 불을 켠다. 여기서 사달이 난 것이다. 예를 들어 DR콩고는 과거 벨기에 식민지였다. 벨기에는 ‘우리도 기술이 있는데 왜 한국이냐’고 CENI를 압박했다. 한국 기업의 진출을 견제하려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8월 현재 투표시스템은 3만6천 대가 납품됐다.
미루의 투표시스템은 지난 5월 이라크 총선에서도 논란이 됐다. 미루는 2017년 4월 기구의 회원국인 이라크 선거위원회와 1500억원 규모의 전자 투·개표 장비 납품 계약을 맺었다. 이는 한국 선관위나 ODA와 상관없이 미루와 이라크 선거위원회 사이에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계약을 알선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총선 뒤 부정선거 시비가 불거졌고, 이라크는 결국 수개표를 진행해 8월10일 결과를 발표했다. 13개 주는 일치했고 5개 주에서 당선자 6명(같은 정당에서 5명 변경, 정당간 변경 1명)이 바뀌었다. 김용희 전 총장은 이에 대해 “이라크의 경우 미루가 100% 이라크 예산으로 실시한 국제경쟁입찰에 참여하여 거대 국제기업들을 이기고 낙찰을 받아 진행한 사업이다”며 “성공적으로 치러진 키르기스공화국 지방의원 보궐선거(2015년 5월)에서 사용한 기계를 이라크에서도 썼지만 (이라크 내부의)시스템 설계와 운영이 잘못됐다. 우리(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인볼브(참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13개주에서 재검표 요구가 있었고 결과 기존 투표 결과와 100%일치했다. 이라크 선관위 발표 결과 미루가 제공한 광학스캔 투표기는 100% 정확하게 작동된 것으로 확인 됐다. 일부 결과가 다른 지역의 경우 투표소 종사자들의 운영미숙이나 관리자들의 부정이 개입, 당초 무효처리했던 해외 투표자들 표를 합하면서 달라진 것이다”고 덧붙였다.
DR콩고와 이라크에서 벌어진 논란은 민간 기업이 해당 국가 선거위원회와 계약한 것이기 때문에 절차적으로 선관위의 책임은 없다. 하지만 선관위의 통제를 받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를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8월30일 경기도 과천 선관위에서 만난 김대년 사무총장은 “2016년 11월 말에 사무총장을 맡고 조기 대선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후 살펴보니 세계선거기관협의회 운영이 말도 안 되게 이뤄지고 있었다”며 “DR콩고의 경우 선관위도 모르게 김용희 전 사무총장이 계약을 추진했다. 외교부가 국제사회의 우려가 있다는 전문(2017년 11월29일)을 보내와 알았다. 이라크의 경우도 나중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지휘·감독 책임이 있지 않냐’는 질문에 “선관위의 지휘·감독 책임이 있다. 김용희 전 사무총장이 현직에 있을 때 이를 견제하지 못한 공무원 조직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김 전 사무총장의 개인적 일탈로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매도되는 것은 안타깝다. 그래서 내부 감사를 했고, 전례 없이 수사 의뢰를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의 잘못을 단절하려는 노력으로 봐달라. 세계선거기관협의회 사업 문제는 면밀히 분석해서 잘못된 것은 정리하고 애초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선관위 내부 감사 결과 보고서는 김용희 전 사무총장이 미루의 영업활동을 지원했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주관하는 장비 시연회·ODA 사업추진 국회 출장에 미루 관계자를 15회 동행시켜 중요한 사업정보를 사업자로 선정되기 전에 알게 해 장비 개발을 하게 했고, 미루가 개발 완료 단계에서 입찰을 공고하는 방법으로 독점 수주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2016년 에콰도르, 2017년 엘살바도르·피지 등의 사업에서 미루가 단독 응찰해 30억원 규모를 수주했다”는 게 선관위의 조사 결과다. 보통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ODA 사업은 입찰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헤 사업 초기 단계에 참여 업체를 공개 모집하는데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용희 전 사무총장은 “대부분 미루의 자체 사업에 동행한 것일 뿐이다. 입찰에도 기술력이 되는 미루만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입찰 예정 가격을 알려준 것도 아닌데 입찰 방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세계선거기관협의회가 ODA예산을 사용한 액수는 4년간 60억원이 넘지 않지만 이를 발판삼아 미루가 수출한 금액은 3000억원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선관위 감사 자체가 방향점을 정하고 시작됐다. 우리는 단 하나도 법에 위반된 것이 없다. 국가에 봉사했다고 생각한다.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
무분별한 ODA 사업 점검해야
세계선거기관협의회를 둘러싼 논란에는 현지 사정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무분별하게 이뤄진다는 비판을 받는 ODA 사업의 문제점도 드러난다. 선관위 내부 감사에서도 “ODA 사업 추진시 현지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후 수원국(지원받는 나라)의 정치 환경, 사업 추진 의지 등 제반 사항을 검토하고 사업 추진 절차를 준수하여야 함에도, 세계선거기관협의회는 이러한 절차 없이 현지 타당성 조사를 선행하여 매년 다수의 사업이 부적합 판정을 받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DR콩고에 다녀온 김장생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교수(국제구호·빈곤 전문)는 “DR콩고에선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지인들의 삶의 문제를 기술 문제로 환원해 단순화하는 사업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참여연대도 8월19일 논평을 내어 “선관위는 DR콩고에서 진행되는 해당 사업을 재검토하는 것을 포함해 책임 있는 조처를 해야 한다. 나아가 전자투표가 부적합한 나라에 전자투표의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한국 선거제도 해외 전파’ 사업도 그 타당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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