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모두 다함께, 막무가내 무죄 주장

‘40년 지기’ 박근혜와 최순실 나란히 법정에…

핵심은 592억원 뇌물, 부정 청탁 여부 등이 최대 쟁점으로
등록 2017-05-30 10:58 수정 2020-05-02 19:28
삼성 등 대기업에서 총 592억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한 혐의로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5월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 나란히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삼성 등 대기업에서 총 592억원의 뇌물을 받거나 요구한 혐의로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5월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 나란히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이 21년 만에 전직 대통령을 맞았다. 내란 혐의 및 비자금 조성 혐의로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섰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처음이다. 5월23일 국내 지방법원에서 가장 넓은 법정의 150개 방청석은 ‘세기의 재판’을 보러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유일한 빈자리는 피고인석 3자리뿐.

오전 10시, 법정 왼쪽에 위치한 피고인 출입구 문이 열리자 350여 개의 눈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 남색 정장 차림에 정치 인생 내내 고수한 예의 ‘올림머리’를 한 박근혜(65) 전 대통령이 들어섰다. 그가 피고인임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왼쪽 가슴에 붙은 503번 수인번호가 유일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으로 민간인 신분이 된 지 75일, 3월31일 구속돼 미결수형자가 된 지 53일 만의 ‘외출’이었다.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공범들이 함께 선 법정은 뜨겁고도 차가웠다. ‘40년 지기’, 그러나 이제 가장 많은 혐의의 공범이 된 최순실(61)씨에게 박 전 대통령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최씨가 “40여 년 동안 지켜본 대통령을 나오게 해서 너무 많은 죄인인 거 같다”며 눈물을 쏟을 때도 시선은 오직 맞은편 검찰석을 향했다. 낮은 목소리로 “(18개 공소사실을 전부 부인하는) 변호인 입장과 같다”며 무죄를 주장할 뿐, 긴말을 아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나

박 전 대통령은 18개 혐의의 피고인이다. 뇌물(제3자 뇌물수수, 제3자 뇌물요구),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 등 죄명만 5개다.

그중 핵심 뇌관은 삼성·롯데·SK로부터 받거나 요구한 ‘592억원 뇌물’이다. ‘592억원 뇌물’에 적용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 제3자 뇌물 혐의는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는 중대 범죄다. 또 다른 핵심 혐의인 직권남용죄 형량이 최대 징역 5년인 데 견줘 상당히 무겁다. ‘뇌물 받은 대통령’이란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무죄 증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는 특이한 구조다. 뇌물은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부정하게 금품을 받는 걸 말하는데, 실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건 없다. 돈을 받은 건 최씨가 장악한 미르·케이(K)스포츠 재단(삼성 204억원)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16여억원), 그리고 최씨의 유령회사인 ‘비덱스포츠’(213억원) 등이다. 이 때문에 민간인 최씨에게 넘어간 돈을 공무원인 박 전 대통령이 받은 것과 같이 보려면, 두 사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임을 보여주는 게 필수적이다.

실제 특별검사팀은 앞서 최씨의 ‘뇌물’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의상비 및 진료비 대납, 차명폰 통화 내역, 주택 대리 구입 등을 근거로 두 사람이 공사 영역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최씨 ‘뇌물’ 재판에선 조카 장시호씨가 나와 “이모가 박 전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 받은 선물은 물론, 박 전 대통령 삼성동 사저에 있던 가구까지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박 전 대통령이 성형 시술을 받은 차움의원의 간호사도 최씨가 매번 박 전 대통령의 진료비를 결제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가족과 마찬가지임을 보여주는 증언은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증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두 사람이 운명 공동체임이 입증되더라도, 최씨가 받은 돈이 모두 뇌물인 건 아니다. 직무 관련 금품이어야 하고, 대가성이 있어야 한다. 판례는 대통령의 직무 범위를 다른 공무원에 비해 폭넓게 인정한다. 대법원은 1997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건에서 “뇌물은 대통령의 직무에 관해 공여되거나 수수된 것으로 족하고 개개의 직무 행위와 대가적 관계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모든 국정 영역을 관장한다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결정적 한방’을 만드는 무수한 ‘잽’

단순 뇌물보다 입증이 더 까다로운 뇌물도 있다. 전체 592억원 가운데 삼성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말 구입 등을 위해 직접 최씨 회사에 제공한 뇌물 213억원을 뺀 379억원이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삼성·롯데·SK로부터 재단 출연금이나 영재센터 후원금 명목으로 받거나 받기로 한 돈이다. ‘379억원 뇌물’엔 제3자 뇌물수수 혐의가 적용됐는데, 이 혐의가 인정되려면 직무관련성에 더해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것도 입증돼야 한다. 우리 법원은 ‘부정한 청탁’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편이다. 대가관계 합의에 대해 묵시적 청탁만 있어도 충분하단 것이다. 대법원은 최근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이 아들 요트회사를 통해 STX조선해양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에서, ‘묵시적 인식과 양해도 부정한 청탁’이란 취지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과 두세 차례 거친 독대에서 경영권 승계(삼성), 면세점 특허(롯데) 등에 대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사건과 ‘동전의 양면’ 같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도 쟁점은 엇비슷하다. 먼저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세 차례 단독 면담하면서 부정한 청탁을 주고받거나 대가관계를 합의했는지가 관건이다. 특검팀은 박 전 대통령이 독대 자리에서 최씨 딸 정유라씨에 대한 승마 지원 등을 요구했고, 이 부회장은 그 대가로 금융지주회사 전환 승인 등 기업 현안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판단한다. 물론 이 부회장은 어떠한 청탁도 하지 않았단 입장이다.

이 부회장 쪽이 “특검 공소장에 추측과 논리적 비약이 가능하다”고 하거나 박 전 대통령 쪽이 “추론과 상상에 의한 기소”라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실제 두 사람을 빼곤 ‘부정한 청탁’의 목격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특검은 독대 전후 상황을 바탕으로 퍼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독대 전 준비된 ‘대통령 말씀자료’와 독대 후 대통령 지시 사항을 기록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을 바탕을 독대 상황을 재구성했다.

‘결정적 한방’은 없지만 무수한 ‘잽’을 모아보면 퍼즐이 완성된다. 지난 5월24일 법정에서 공개된 공정위 작성의 ‘청와대 외압 일지’를 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뒤 삼성이 삼성물산 주식 1천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삼성과 청와대의 ‘쌍끌이 압력’으로 2개월 만에 기존 결정을 뒤집고 처분 주식을 500만 주로 줄여준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의 자문을 맡은 공정위 부위원장 출신 전관까지 공정위에 청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서울고법은 옛 삼성물산 주주인 일성신약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옛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이 이건희 등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에 의해 의도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독대 전후 여건이 ‘경영권 승계’에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게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 석연치 않단 얘기다.

6월8일 예정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선고에도 눈길이 모인다. 문 전 장관은 재직 시절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고 복지부 산하 국민연금공단이 삼성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 개입 여부에 대한 판단이 문 전 장관 판결문에 담길 수도 있다.

다만 검찰이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재판에서 넘어야 할 산은 이른바 ‘이중 기소’ 문제다. 삼성의 433억원 뇌물엔 직권남용, 강요와 뇌물 죄명이 동시에 적용됐다. 같은 돈을 두고 삼성은 피해자이자 공범이 된 것이다. 삼성과 박 전 대통령 쪽이 ‘약한 고리’로 꼽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 검찰은 두 혐의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입장이다. 공무원이 먼저 금품을 요구하는 ‘요구형’ 뇌물의 경우, 뇌물 요구 과정에서 강요 성격이 있단 판단이다. 실제 대법원도 관내 건설업자에게 제3자 계약 체결을 먼저 강요한 공무원에게 직권남용죄와 제3자 뇌물수수죄가 모두 성립한다고 지난 3월 판시한 바 있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모른다’ ‘지시·보고 없었다’ 힘없는 전략

이 밖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직권남용·강요도 핵심 혐의 중 하나다. 박영수 특검은 지난 3월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블랙리스트는 세기의 재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블랙리스트’ 재판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과거 독재정권 시기에 머물러 있는 박근혜 정권의 정책 기조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하라고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진행된 블랙리스트 법정에 나온 증인들의 손가락은 박 전 대통령을 가리킨다. 지난 5월16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재판에 나온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박 전 대통령이 건전 콘텐츠를 관리하라”는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다고 증언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블랙리스트 책임을 묻는 것은 살인범을 낳은 어머니에게 살인죄 책임을 묻는 것이다.” 다시 5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대법정. 박 전 대통령 쪽 유영하 변호사의 ‘살인범 어머니’ 비유는 이번 재판에 임하는 박 전 대통령의 태도를 집약해 보여준다. ‘국정 농단’은 참모와 지인들 개개인의 일탈 행위일 뿐, 자신이 관여한 바는 없다는 취지다. 이런 ‘꼬리 자르기’ 전략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18개 혐의를 일제히 부인하는 것도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무죄가 선고되지 않으면, 사실관계가 분명한데도 무조건 부인 전략을 취할 경우 반성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돼 양형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선고는 이르면 1심 구속기간(최대 6개월)이 끝나는 10월 중순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사건을 맡은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가 ‘국정 농단’ 공범의 선고 시기를 맞추겠다고 밝히면서 이미 심리가 사실상 끝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비롯해 김종 전 문체부 차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 공범들은 박 전 대통령 사건이 끝나길 기다리게 됐다. 박 전 대통령과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구속기간 만료(8월27일)를 고려해 법원 판단을 먼저 받을 가능성도 있다. ‘뇌물’ ‘블랙리스트’를 제외한 ‘의료 농단’ ‘이화여대 입시·학사 비리’ 재판은 이미 1심 선고가 나거나 예정된 상태다. 박 전 대통령에게 미용성형 시술을 하고 기록을 누락한 혐의를 받은 김영재씨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고, 국회 위증 혐의의 정기양 전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에게 입시·학사 관련 특혜를 준 혐의를 받는 김경숙 전 학과장 등 이화여대 교수들에겐 6월에 판단이 내려진다.

현소은 법조팀 기자 soni@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