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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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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에서 사라진 촛불의 열망

[공약 점검] ‘흙수저’ 청년들의 문재인·안철수 10대 공약 평가…

“기약 없는 최저임금 1만원·맥 못 짚는 4차 산업 정책”
등록 2017-05-05 04:04 수정 2020-05-02 19:28
은 4월26일 저녁 8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청년 4명을 만났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심희선(32)씨, 서울메트로에서 안전 업무를 하는 임선재(34)씨, 대학생 김동훈(21)씨, 이찬진(19)씨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4월30일 ‘장미혁명페스티벌’을 연 뒤 5월1일에는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위한 하루 파업을 한다. 김선경 서울청년네트워크 대표의 도움으로 모인 네 청년들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10대 공약을 앞에 두고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2017년을 사는 평범한 청년들은 두 후보의 공약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들의 속얘기에 귀 기울여봤다. _편집자
청년들이 직접 문재인·안철수 대선 후보의 10대 공약을 평가했다. 왼쪽부터 심희선, 이찬진, 임선재, 김동훈씨. 김봉규 선임기자

청년들이 직접 문재인·안철수 대선 후보의 10대 공약을 평가했다. 왼쪽부터 심희선, 이찬진, 임선재, 김동훈씨. 김봉규 선임기자

5월9일 치르는 19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김동훈  끊임없는 아르바이트다. 고등학교 때부터 급식실에서 배식 보조를 하고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대학교 1학년 1학기에는 쉬었고 2학기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다. 지난 3월 퇴사했다. 미대에 다녀서 등록금뿐 아니라 재료비 등 많은 돈이 든다. 경제력이 있으면 유학을 가거나 바로 졸업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 졸업도, 사회 진출 시기도, 결혼도 늦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자신의 힘만으로 끊어내기 어려운 악순환이다. 그래서 차라리 ‘장미파업’같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임금·의료 불평등·투표권 없음…
“물리치료사는 5년 이상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동자는 방전되면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다.” -심희선

“물리치료사는 5년 이상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노동자는 방전되면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다.” -심희선

심희선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11년째 일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일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건 의료 차별이다. 우리 병원 지하에는 일반 건강보험 환자의 치료실이 있다. 주차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창문도 없고 나쁜 냄새가 난다. 가스레인지나 세탁기를 쓸 때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지하라 모기가 사계절 내내 돌아다닌다. 반면 비싼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한 VIP들은 지상에서만 머문다. 방도 더 좋고 세탁기를 쓰기 위해 추가 비용을 낼 필요도 없다. 두 집단은 마주칠 일도 없다. 한 병원에서 극심한 차별이 이뤄지는 셈이다. 최근 민간 의료보험이 활성화하면서 의료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치료가 절박한 이들이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내몰리고 있다. ‘의료 난민’이란 이야기까지 나온다.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일반 건강보험 환자는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야 한다.

이찬진  2015년 말부터 국정교과서 반대 운동을 했다. 2년이 지났다. 박근혜가 탄핵됐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 기회가 왔다. 하지만 11월에 태어나 만 18살이다. 투표권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청소년은 선거운동도 할 수 없다. 국회의원 출마는 만 25살부터 가능하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학교에서 가끔 시사 관련 토론회를 한다. 하지만 토론회는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사회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학생부에 한 줄 남기기 위한 것이 돼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막상 대학생이 되면 사회적 쟁점에 대해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이 정치에서 소외, 배제되는 것은 불평등하다고 느낀다.

임선재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숨진 김군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서울메트로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 안전 업무를 한다. 지난해 사고 이후 ‘안전의 외주화’ ‘위험 업무의 용역화’가 이슈가 됐다. 그 뒤 직접고용을 해서 무기계약직이 됐다. 하지만 정규직은 아니다. 승진할 수 없고, 급여도 적다. 회사 쪽에선 정규직의 90% 임금을 준다고 한다. 초봉 기본급은 우리가 140만원, 정규직은 150만원 정도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벌어진다. 정규직은 승진을 하니까 급여가 빠르게 올라간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기본급에서만 10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난다. 무기계약직 전환으로 고용은 보장됐지만 저임금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다. 일하는 다른 청년들의 고민도 비슷한 것 같다. 고용불안과 저임금. 다음 정부에선 이 두 가지가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줄 공약이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10대 공약에 있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웃음이 터졌다. 희망을 걸 만한 공약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두 후보의 공약을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두 후보의 공약을 평가해본다면.
“촛불시위의 의의는 우리 마음속에 남았다. ‘할 수 있다, 무섭지 않다’ 거기에 희망을 건다.” -김동훈

“촛불시위의 의의는 우리 마음속에 남았다. ‘할 수 있다, 무섭지 않다’ 거기에 희망을 건다.” -김동훈

김동훈  안철수 후보의 4차 산업 공약은 부실해 보인다. 대학에 4차 산업을 활용한 프로젝트가 많다. 3차원(3D) 프린터를 활용해 재래시장 조명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래시장에도, 학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장 소상인들은 학생들이 한번 우르르 와서 큰 효과 없는 작품이나 시설을 설치하고 또 우르르 돌아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학생들도 특별한 교육을 받는다기보다 이력서에 한 줄 넣을 스펙을 남기자는 차원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이나 소상공인이 4차 산업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됐다는 것이다. 4차 산업의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예전에는 선배 졸업작품에 후배 5~6명이 달라붙어서 일해야 했다. 최근에는 3D 프린터 때문에 절반의 인원만으로도 졸업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 학교만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직장에서도 필요 인력이 줄어들 것이다. 4차 산업 관련 정책은 기본소득이나 노동시간 단축 등과 연계돼야 한다. 그런데 안 후보는 “학제 개편으로 4차 산업혁명 대비 창의적 인재 양성”을 하겠다고 한다. 노동자가 줄어드는데 이 문제를 노동자 교육으로 해결하겠다는 식이다. 문재인 후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핵심 기술 분야에 적극 지원”해 4차 산업을 선도하겠다는 말뿐이다.

이찬진  안 후보는 10대 공약에 최저임금 언급이 없다. ‘사장님 마인드’를 가진 것 같다.

임선재  지난해 김성식 국민의당 정책위원장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안 후보는 2022년으로 시기를 후퇴시켰다. 임기 내에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문 후보가 말하는 2020년도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청년들은 당장 내년부터 1만원 도입을 이야기한다. 돈을 올려달란 게 아니다. 그동안 못 받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공공부문 일자리라고 다 좋진 않다”
“청년들은 당장 내년부터 최저임금 1만원 도입을 이야기한다. 올려달란 게 아니다. 그동안 못 받은 것이다.” -임선재

“청년들은 당장 내년부터 최저임금 1만원 도입을 이야기한다. 올려달란 게 아니다. 그동안 못 받은 것이다.” -임선재

심희선  일자리 공약이 이슈다. 하지만 일자리 자체를 늘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노동자가 물건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문제다. 물리치료사 업무는 고되다. 근무시간은 일정하지만 1분, 1초도 쉬기 어렵다. 시간은 회사의 것이니까. 허리가 찢어질 듯이 아파서 관리자에게 15분 정도 누워서 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앉아서 쉬라고 했다. 심지어 여성 노동자는 생리대를 갈 시간도 없다. 탐폰(체내형 생리대)으로 하루 종일 버텨야 한다. 손목 인대가 끊어져 수술하고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일이 빈번하다. 주변에 인대가 손상된 동료들이 절반 이상이다. 그러다보니 5년 이상 일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11년차인데 5년차 이후 여자 선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만둔 직장 선배들은 삼겹살집에서 일하거나 의료기 영업, 보험상품 판매를 한다. 병원에서도 5년 이상 근무하면 안 좋아한다. 몸이 여기저기 고장났다는 것을 알고, 더 싼 돈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물리치료사를 써먹을 수 있으니까. 공공부문이라고 다 행복한 일자리가 아니다. 대학에서 4년 공부하고 국가고시 본 뒤 5년밖에 일하지 못하는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의미 없다. 문재인 후보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공약이 몇십만이라는 숫자에 매몰된다면 성공할 수 없다. 일자리 늘리는 것은 병원도 하고 있다. 돈이 되니까. 노동자는 방전되면 버리는 건전지가 아니라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김동훈  안 후보의 일자리 공약을 보면 창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있다. 대학에서도 창업이 중요하다며 관련 과목을 필수이수 과목으로 하거나 학점 받기 쉬운 절대평가 과목으로 개설한다. 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듣는다. 그런 강의에 오는 청년 창업자는 성공한 소수의 사례다. 심지어 그들도 이후 구체적인 비전이나 수익 창출에는 자신 없어 한다. 창업은 어차피 몇 명만 성공하는 불확실한 미래다. 창업 강의를 개설할 재원이 있으면 차라리 노동법 강의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불확실한 창업으로 청년을 내몰기보다 노동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찬진  두 후보 모두 10대 공약에 청소년 선거권 내용이 없다. 청소년 참정권은 언제나 후순위로 밀린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청소년도 여러 요구가 있다. 자신이 배우는 교과서를 만드는 데 직접 참여하고 싶고, 여러 교육정책 의견도 내고 싶다. 하지만 선거 때가 되면 청소년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공약은 언제나 뒷전이다. 이제 정치 참여 주체로 청소년을 인정해줄 때다.

이날 모인 청년들은 파편적인 공약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삶에는 4차 산업, 일자리, 창업, 복지 등 다양한 영역의 정책이 복합적으로 개입한다. 하지만 청년들은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공약에서 이같은 진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두 후보가 촛불시위 정신을 이어간다고 보나.
“청소년 참정권은 언제나 후순위로 밀린다. 우리도 교육정책에 의견을 내고 싶다.” -이찬진

“청소년 참정권은 언제나 후순위로 밀린다. 우리도 교육정책에 의견을 내고 싶다.” -이찬진

이찬진  지금도 서울 광화문에 가면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천막 치고 노숙하는 분도 많다. 청소년들도 오래전부터 투표권 운동을 하고 있다. 모두 지난해 겨울 촛불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이다.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 기회를 만들었다면 이들을 위한 정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이 그런 간절한 목소리를 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론적이기만 하다. 촛불시위에 나선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서려면 아직 먼 것 같다.

심희선  촛불시위의 열망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 듯하다. 광화문에서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민주주의 회복과 세월호 참사 등에서 무시된 인간의 존엄함 등이었다. 하지만 두 후보의 10대 공약은 대부분 표가 될 만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복지 공약으로 회유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나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지난 겨울 4개월 동안의 뜨거움을 보상받기에는 너무 미흡한 공약들이다. 대통령에게만 기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촛불시위로 우리가 배운 것은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주면 된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이다. 회사 쪽은 노동조합을 없애려 손해배상 소송을 내고 어용노조를 만들고 인사에 불이익을 주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부당노동 행위는 인정받기도 어렵고 처벌도 솜방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힘이 약한 비정규직 노조는 버틸 수 없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싸우겠다.

영웅은 필요 없다, 우리가 싸운다

임선재  1600만 명의 국민이 촛불을 든 것은 박근혜 하나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최저임금 정책,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입장 등을 보면 답답한 마음뿐이다. 철저하게 표를 의식한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촛불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동훈  대선 후보들이 촛불시위를 보고 뭔가 깨달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촛불시위의 의의는 우리 마음속에 남았다. 우리 또래에 남은 것은 두 가지다. ‘할 수 있다, 무섭지 않다’.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촛불시위 정신이 이어진다면 나쁜 방향으로 달려가는 정부를 제어할 수 있다. 이번 대선으로 뭔가 바로 이뤄지지 않아도 시민이 촛불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에서 희망을 본다.

사회·정리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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