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거대한 질문이다. 하지만 정답 없는 우문이기도 하다.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고, 권력을 얻고 유지하고 나누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 권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과 질서를 통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념이면서 관행이고, 제도이면서 양식이기도 하다. 정의로워야 하지만 정의되지 않는 무엇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정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우리 삶에 존재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도록 정치가 도와야 한다.
‘와글’( www.wagl.net). 소란스럽고 북적이는 느낌의 이 단체 혹은 회사는 ‘와글와글한 군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실험을 하는 정치 스타트업’을 표방하며 2015년 8월 출범했다. 구체적으로 그게 뭘까 싶지만 이들은 툭툭 ‘물건’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온라인 연설문 작성 플랫폼 ‘필리버스터닷미’를 오픈했던 이들은 이번에는 시민의 제안을 모아 직접 입법에 도전하는 플랫폼을 세상에 내놓았다. 10월11일, 시민주도형 입법 플랫폼 ‘국회톡톡’(http://toktok.io)을 오픈한 와글 팀을 만났다.
어린이 병원, 상가임대차, 공공기관 이력서‘와글’이란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국회톡톡’은 더 생동적인 느낌이다.이진순(와글 대표) 국회톡톡은 시민이 원하는 걸 법으로 만들어보자는 플랫폼이다. 시민들은 어떤 내용인지, 누굴 위한 건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몇천 건씩 입법 발의를 한다. 입법 과정은 철저히 위에서만 존재한다. 이걸 아래서 시작되도록 바꾸자는 것이다.
국회톡톡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법안을 당사자들이 직접 제안하고 국민의 대의자인 국회의원이 이를 수렴하는 구조다. 기존 입법 과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집단이 힘있는 대기업, 이익단체 그리고 조직된 시민사회 정도였다면, 여기서 배제돼 전혀 대변되지 않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치 의제화해보자는 제안이다.
현재 3개의 의제가 오픈됐다. 각각의 의제들을 설명해본다면.오진아(와글 기획자) 현재는 오픈베타 상태고, 지금도 여러 제안이 올라오고 있다. 다만 오픈하며 의제를 제안하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시작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내부 조율을 오래 했다. 온·오프라인에서 많이 이야기됐지만,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슈를 중심으로 당사자 주체가 확실하고 삶에 직결된 문제,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제안을 중심으로 고민했다. 그렇게 3가지 의제가 골라졌다.
우선, 어린이 병원비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슈화되던 문제이다. 얼마 전 국회에서 환아 부모님들의 증언대회가 있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눈물겹게 병원비를 마련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기획팀이 눈물, 콧물을 다 뺐다.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제안은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서 쫓겨난 곱창집 사장님이 직접 제안서를 써줬다. 표준이력서 법제화 문제는 부산의 대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공공기관 이력서 실태를 조사해 발표하고, 이를 몇몇 기관과 기업이 잘못됐다고 인정했단 기사를 보고 찾아가 만났다.
결국 진행 과정에서 어떤 의제가 설정되느냐가 관건일 것 같다.이진순 플랫폼과 프로세스를 제공할 뿐, 와글이 심사나 평가를 하진 않는다. 다만 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민원 청탁성은 취지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이미 지역구 의원이 주로 받는 제안들이다. 실제 국회의원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자신은 국민을 엄청 많이 만나고 다닌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민원 이해관계자다. 국회톡톡에 부디 공적 이슈, 공익적 문제가 풍성하길 기원한다.
혐오적·차별적 입법도 되나요?온라인 공간의 특성상 운영자의 개입이 없으면 걸러지지 않는 주장이 동조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 입법은 기본적으로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수 있어 예민한 문제기도 하다. 예컨대, 혐오나 차별 같은 문제가 지지를 얻으면 어떻게 되는가.이진순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충분히 신뢰한다. 부정적 방식으로 풀려나가는 것에 대한 견제와 감시 장치가 작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경험적으로도 그렇다. 국회톡톡 이전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국면에서 필리버스터 시민 참여 사이트를 만든 적이 있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자정에 모여 다음날 아침 9시에 뚝딱 오픈했다.
딱 한 가지만 요구했다. 연설하는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적어달라고. 아무런 개인정보도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자면 연설문을 써달라고 한 것이다. ‘악플’로 도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는데, 놀랍게도 20만 명이 참여하고 3만8천여 건의 글이 게시됐는데 악플은 거의 없었다. 비율로 따지면 0.1%도 안 됐다.
인터넷 공간의 혼탁함을 많이 우려하지만 양극단의 ‘어그로’(온라인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현실에 반영돼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상상 이상으로 충실하게 임한다.
오진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국회톡톡은 1천 명이 동의를 해줘야 출발할 수 있는 구조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올린다 한들 동의자를 구할 수 있을까. 설령 그렇게 동의자를 구한들 그 내용이 혐오 조장이나 차별 선동이라면 그 입법을 하려는 국회의원이 연결될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차피 혐오나 차별을 조장하는 주장을 하는 국회의원은 이 플랫폼이 있거나 없거나 존재한다.
<i> 미국 시민대학의 창립자 에릭 류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이해하고 그것을 민주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해하려면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의제 체제에서 정치인들은 ‘권력자’로 존재하며 정치는 회피의 대상, 정치의 과정은 기피하고 싶은 문제가 됐다. 진부한, 누구나 아는 얘기다. 핵심은 그것을 어떻게 ‘민주화’할지의 문제일 텐데 누구도 선뜻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도, 번뜩이는 직관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와글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을 관통하는 것으로 보였다. 누구나 접속하는 온라인의 ‘직접성’이 대안을 모색할 수 있고, 그 참여와 집단지성이 혜안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다만, 문제는 우리의 정치가 지극히 일방적이고 혼탁한 현실 위에 놓여 있단 점이다. </i>
박윤중(와글 기획자) 맞다. 플랫폼은 3단계로 설계돼 있다. 누군가의 제안과 시민들의 지지, 그리고 의원의 참여를 통한 매칭이다. 입법 활동의 최종 단계에 이르면 의제 코어 그룹이 만들어지고, 시민과 국회의원이 함께 드림팀을 이뤄 입법을 끌어가게 된다.
그동안 다양한 방식의 입법 운동이 있어왔지만, 입법권을 국회의원이 독점한 현실에서 어떻게 전개되든 최종 권한은 국회의원이 가질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나.황지영(와글 기획자) 국회톡톡을 만들며 해외와 국내의 사례를 많이 찾아봤다. 많은 나라들이 일정 수의 시민이 제안해 지지하면 자동으로 국회에 상정되는 법안을 갖고 있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는 개헌까지 해서 그런 장치를 만들었다.
우리는 전혀 그게 안 된다. 세월호 특별법의 경우 600만 명 넘게 서명해도 국회는 들쳐보지도 않고 파묻는다. 물론 입법권 없이 할 수 있는 입법 청원 모델은 많이 있다. 하지만 시민과 국회의원이 함께 입법을 하는 사례는 많지 않았다. 의원이 먼저 시민에게 입법 제안을 하는 프랑스의 사례 정도가 있다.
국회톡톡의 핵심은 국회의원과 시민이 팀을 이룬다는 데 있다. 그동안 우리의 입법 운동에서 시민 참여는 동원의 느낌이었다. 국회의원의 명분에 시민이 치어리더를 하는 격이었다. 국회톡톡은 시민이 제안할 테니 국회의원이 받으라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하니 시민들도 참여하라는 것도 아니다. 함께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톡톡 안에서는 상반되는 의견이더라도 필터링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동의와 지지를 어떻게 구하고 설득하느냐는 과정 자체다. 그렇게 의견이 모이면 다시 이 찬반에 동의하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의견을 대의하는 방식으로 싸우든지 할 수 있다. 국회는 어차피 다른 의견과 세력을 대변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국회톡톡은 그 근거가 되는 국민의 의견을 구체화해내는 공간이다.
시민과 국회의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팀을 이루는 것인가.오진아 현재 진행 중인 어린이 병원비 이슈의 지지자는 700명이다. 1천 명이 되면 2단계 국회의원 매칭이 시작된다(인터뷰 이후 하루 만에 지지자 1천 명을 달성했다). 현재 그 제안 페이지에 해당 이슈를 다뤄야 하는 국회 상임위원회 의원 명단을 올려두었다. 1천 명에 도달하면 해당 상임위 의원 전원에게 전자우편으로 알리고, 입법 참여 여부를 2주 안에 알려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응답이 오건 안 오건 그 내용을 그대로 국회의원 사진 밑에 표시할 것이다.
국회톡톡의 핵심이랄까 힘은 입법 프로세스 전체를 공개한다는 데 있다. 입법 과정 전반이 불투명한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자는 취지도 있다. 입법이 단기간에 빨리 되는 것이 아니기에 팀을 이루고 코워킹(Co-working·협업) 그룹을 만들어 비조직 개인도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확보하는 것이다. 코워킹 그룹에는 제안자뿐 아니라 해당 이슈의 전문가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 주장이 법안으로 문안화하는 과정에서 다시 토론하고 함께 수정·보안하는 과정도 당연히 밟게 된다. 시민과 국회의원이 이루는 팀 활동의 전 과정이 온라인에 투명하게 공개된다.
박윤중 입법 취지라는 명분을 손에 쥐고, 공개에 기반한 투명한 메커니즘으로 국회의원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지금까지의 입법 로비는 기업이나 힘있는 기관이 자신만의 정보를 국회의원에게 제공하거나 밥 먹고 술 먹으며 얘기하는 것이었다. 국회톡톡의 무기는 투명함이다. 어떤 의제에 국회의원이 응답하는지 거부하는지, 읽고 씹는지 모든 것을 공개해 시민 앞에서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다.
누구나 써도 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투명하고 공공적인 로비스트로 활동하겠단 말인가.이진순 로비 활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만, 뇌물이나 비리에 관련되지 않고 순수한 당사자들이 국민을 대의할 뿐인 국회의원에게 요구 사항을 갖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동안 로비가 암암리에 지연, 학연과 연관된 게 문제다. 그 연결에 용의했던 이는 재력과 권력이 있거나 명망을 얻은 사람들이었다.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은 국회 근처에도 가보기 힘든 현실에서, 국회의원들이 시민 몇천 명이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된다면 국회톡톡이 의미를 지니게 될 것 같다.
오진아 국회의원은 다 똑같지 않다. 좋은 국회의원도 있고, 더 열심히 하는 국회의원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걸 모른다. 그냥 정치는 다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도 시민들의 요구를 잘 모른다. 서로 채널이 다르다. 이걸 매칭하는 플랫폼이 국회톡톡이다. 온라인의 힘은 오프라인 현장에서 나오고, 현장의 움직임을 국회의원이 알게 하는 쌍방향 채널이 된다면 사례를 만들 수 있다.
<i> 시민 참여, 투명함 그리고 정치 혁신. 와글과 그들이 개발한 국회톡톡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 키워드가 구체화된 건 공유와 협업이었다. 와글은 국회톡톡을 개발하며 온라인 개발자 협동조합 빠흐띠( parti.xyz), 그리고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와 논의했다. 국회톡톡의 개발 코드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다. 정치 독점을 깨는 행위를 해나가는 데 그 원천 정보 또한 독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i> 와글은 정치 스타트업을 표방하지만, 활동을 보면 ‘운동’ 성격이 강한 것 같다. 온라인 기반으로 ‘정치’를 직접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이진순 착한 투자자를 기다리는 일개 스타트업일 뿐이다. (웃음) 정당 준비 주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정당이나 특정 정파, 개인 캠프들과 전혀 친소 관계를 갖지 않고, 시민의 정치 참여와 정치 혁신이란 모토로 중재자 역할을 하려 한다. 물론 일을 하다보면 지금의 정치가 백날 얘기한다고 바뀌느냐 혁신이 되겠느냐 하는 분을 많이 만난다. 하지만 정치가 바뀌려면 정당의 프로세스가 바뀌어야 하고 그걸 바꾸도록 누군가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지 않다. 참여 방법을 모를 뿐이다. 그 방법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스타트업, 뇌관이 되겠다.
“시민의식은 문제 회피한 적 없다”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전제돼야 유지 가능한 모델처럼 보이는데, 오늘을 지배하는 정서는 정치 냉소다.오진아 국회톡톡을 기획하며 온라인에 있는 대중, 시민들은 도대체 누굴까를 제일 많이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 강남역(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포스트잇을 붙였던 젊은 여성들, 구의역(지하철 스크린도어 하청노동자 사망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국화를 놓고 떠났던 청년들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조직 없이 홀로 애도하는 사람들, 그냥 ‘너는 나’라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익숙한 운동 방식에서 벗어나 지금의 온라인 세대가 가진 역동성과 과거 같으면 묻혔을 이슈에 결집되는 에너지를 정치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정치에 전혀 냉소적이지 않다. 반(反)정치주의를 넘어서는 현장의 에너지는 이미 생겼고, 반응하고 있다.
이진순 한국 정치를 비관적으로 얘기하는 분들을 보면 화가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정치는 ‘된다’. 경직된 정치 구조 아래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고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국면을 열어간 것은 언제나 이름 없는 군중, 시민들이었다. 한국 사회의 시민의식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절망해서 도망가거나 문제를 회피한 적이 없다.
바뀌지 않은 건 정당과 정치 지도자일 뿐이다. 그들이 운영하는 정치 시스템이 바뀌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돈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정치뿐이다.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시민은 없다. 다만 안 바뀐다고 생각하니까 냉소할 뿐이다. 새로운 제안과 대안으로 정치가 정의와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바꿔야 한다.
와글은 다양한 목소리의 아우성와글은 다양한 목소리의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의 톡톡거림이 철옹성 같은 여의도의 정치를 흔들 수 있을까.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글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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