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 펼쳐지고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수용 불가’의 뜻을 밝혔다. 지금까지 국회를 통과한 다섯 차례의 장관 해임건의안이 무력화된 적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며 다시 위기론을 들먹였다. 김 장관 본인도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와 ‘황제 전세’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야당 단독으로 진행한 국정감사에서 그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무리수를 두긴 여당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참모 출신인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역시 여당 대표로는 헌정 사상 처음이다. 국정감사는 파행했다. 2005년 말 주군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사학법 장외 투쟁을 벌이며 국회 예산심의를 파행시킨 전례를 답습했다.
김두관 전 장관 해임, 국회 뜻 존중해시계를 13년 전인 2003년 9월로 돌려보자. 노무현 정부 초,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당시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한국대학총학생연합회(한총련)의 미군 사격 훈련장 진입과 장갑차 점거시위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사태는 해임건의안 통과 14일 만에 김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면서 일단락됐다.
은 9월27일 서울 여의도에서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유인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당시와 지금을 되짚었다. ‘엽기 수석’으로 불린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지난 3월 당내 20대 총선 공천 심사에서 탈락했고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는 말로 즉각 결정에 승복했다. 3월 국회 마지막 연설에서 사형제 폐지를 역설한 그는 야당 의원으로는 드물게 여당 의원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은 그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처음과 끝이 같으며,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우는 사람”이라고 했다. 화제는 해임건의안 문제를 넘어 청와대와 국회의 관계, 내년 대선 전망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거부했다.박 대통령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여소야대 국회에선 협치를 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마찬가지로 의회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이다. 두 권력이 충돌하면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결국 박 대통령이 해임건의안을 어떤 형태로든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예산이나 법안 등에서 국회의 협조를 전혀 구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수용 불가’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쓴 건 너무 나아간 것이다. 김재수 장관도 마찬가지다. ‘식물 장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부처를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버티더라도 결국 단명하는 장관이 될 수밖에 없다.
유 전 의원이 청와대 정무수석 시절에도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다.대학생들이 미군 사격장을 기습 점거한 사건을 두고 당시 한나라당이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대학생들의 기습 점거 시위가 어떻게 경찰청장도 아닌 장관 해임건의 사유가 되느냐. 청와대 분위기는 단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굉장히 분개했다. “김 장관이 지방대 출신, 이장 출신이 아니고 서울 유명 대학 출신이었다면 쉽게 해임건의안이 통과됐겠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엔 수용하지 않을 뜻을 취했다.
결국 14일 만에 김 전 장관이 자진 사퇴하는 쪽으로 정리됐다.그래도 국회가 의결한 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도적으로 다수였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와 다수당을 무시하고는 제대로 국정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전 장관이 이대로는 장관직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도 했다.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대단히 부당하지만 이 또한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i> 해임건의안의 당사자였던 김두관 더민주 의원은 9월25일 자신의 트위터에 심경을 옮겼다. 김 의원은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다. 나는 참여정부와 노 전 대통령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그는 “‘당당히 대응해야 한다’는 노 전 대통령에게 다수당의 결의를 받지 않으면 야당과 청와대의 갈등이 계속될 것이므로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i>납득이 안 된다. 글쎄, 박 대통령은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최순실, 우병우 민정수석 건 등으로 쏠리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시도로밖에는 안 보인다. 박 대통령 보라고 하는 단식 같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청와대의 인사가 근본문제 아닌가.처음부터 인사가 문제였다. 정권 초 모두가 나서 반대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임명을 비롯해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 사례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검증에서 중요한 부분이 세간의 평이다. 지금 청와대는 이걸 무시한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한 인사추천위원회에 상당한 권한을 줬다. 검증은 민정 쪽에서 걸러냈다. 그 과정에서 대상에 많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 정부 시절 인사들이 적잖이 걸러졌다.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가 억울한 점이 많을 것이다. “문재인이 호남 사람을 많이 쳐냈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건 결과적으로 검증을 엄정히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의회를 개혁 대상으로 여기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어느 청와대나 국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 청와대는 ‘우린 선의로 국가를 위해 나아가려고 하는데 맨날 국회가 발목 잡는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게 민주주의다.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소양이 없는 것 같다. 아버지 시절 유신정권 때처럼 정부가 하면, 국회가 거수기 구실이나 해주는 게 애국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중앙정보부 같은 걸 만들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문하고 싶은 것 아닌가 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박 대통령이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최태민 목사처럼 정체불명의 사이비에 몰입했던 고립된 심정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회 자율성 존중하지 않는 청와대애연가인 유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최근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가 배후로 지목되는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 건을 거론하면서 “지금 박 대통령의 영혼은 최순실씨가 지배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많은 국민이 대통령의 정신세계가 통제 불능이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다. 박 대통령이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른 독특한 가치관을 지닌 것 같다”고 했다. 말을 쏟아낸 그는 “적절히 표현을 걸러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임기 말이고 의회를 무시하는데도 새누리당에서는 여전히 청와대의 뜻을 맞추고 있다.이례적인 현상이다. 지지율이 아무리 떨어져도 박 대통령이 대구·경북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거라고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은 생각하는 듯하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 뒤에도 호남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박 대통령은 ‘3김’ 이후 마지막 남은 지역 맹주 격이 아닌가 싶다.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도 박 대통령에게 찍히면 어렵다”고 판단하고 청와대 눈치를 보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와 여당의 관계는 어떤 원칙이 있었나.노 전 대통령은 내가 정무수석일 때 국회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한 달에 판공비가 딱 500만원이었다. 청와대가 돈이나 국가정보원 정보 등을 갖고 민원을 해결해주거나 비리를 덮어주는 등의 거래가 없었다. 검찰에도 거의 절대적인 자율성을 주지 않았나. 국회는 해당 장관이 상임위에서 알아서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결국 나를 끝으로 정무수석 자리는 없어졌다.
3당 체제의 20대 국회는 협치를 다짐했다. 그럼에도 계속 파행이다.핵심은 청와대의 개입이다. 청와대가 국회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국회 일은 당에 맡기면 된다. 19대 국회 때도 노동법 등 여야가 대립하는 현안에서 상당 부분 의견 접근이 됐다. 그러나 번번이 청와대가 밀어붙이라고 여당을 압박하면서 깨졌다. 국회는 20대 들어 3당 체제로 바뀌었지만 청와대는 바뀌지 않았다.
<i> 화제는 내년 대선 후보들로 흘러갔다. 정무수석 시절 유 전 의원은 1년 동안 함께 청와대에서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두고 “소심해 정치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해선 “덕 있는 참모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i>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각종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노 전 대통령은 “정치권은 펄밭”이라고 했다. 반 총장은 아직 펄밭에 발을 담그지 않은 ‘구름 위의 신선’이다. 지금 지지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과거 ‘안철수 현상’과 비슷한 것이다. 반 총장은 착하고 남에 대한 배려도 훌륭하다. 그러나 굉장히 소심하다. 정치할 사람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된 사람 아닌가. 그런데 2011년에야 대외비 일정으로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게 대외비로 할 일인가.
<i> 이 대목은 반 총장과 친노 사이의 인연에 앙금이 쌓인 지점이다. 반 총장은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장례식에 불참했다. 추모 영상이나 서면 메시지도 없었다. 반 총장의 봉하마을 방문은 2011년 12월1일에야 이뤄졌지만 반 총장 쪽은 당시 방문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 전 의원은 “조선 상식이라면…”이라고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i>통합과 협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문 전 대표는 꽤 안정감을 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보수 쪽에서도 과격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강점이다. 그럼에도 친노의 이른바 광팬들이 그의 외연 확장에 장애가 되는 게 사실이다. 문 전 대표 주변의 참모들은 덕이 더 있어야 한다. 국민은 후보뿐 아니라 그와 함께 일하는 핵심 주변 인사도 다 본다.
다른 야당 후보들의 가능성은.나는 김부겸 더민주 의원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김 의원과는 1987년 한겨레민주당 때부터 함께해왔다. 나는 한쪽 진영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보다 통합과 협치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다음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부겸만큼 협치·통합을 체험한 사람도 드물다. 친노의 적자라지만 안희정 충남지사도 통합의 행보를 해왔다. 이런 사람들은 후보가 됐을 때 확장성이 큰 반면 당내에서 후보가 되기까지는 난관이 있다.
여당 후보 가운데 주목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유승민 새누리당 의원과 남경필 경기도지사다. 유 의원은 중도보수의 길을 걷다가 박 대통령 눈 밖에 나서 찬밥 신세다. 그러나 나름 통합의 정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남경필 지사는 (‘금수저’라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서 우습게 봤지만 일관되게 새누리당 안에서 개혁적인 길을 추구하고 있다. 경기도에서 연정을 추구하는 걸 보면 그 역시 통합을 할 수 있는 지도자로 보인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내년 대선이 3당 구도로 치러질 것으로 보는가.3자 구도라고 미리 단정할 필요는 없다.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팽팽해서 여당 후보에게 필패할 상황이 되면 그때 가서 단일화를 할 수 있다. 반대로 두 야권 후보 사이 격차가 크게 벌어져 3위 후보 지지율이 확실히 떨어진다면 큰 변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형제는 국가권력의 살인 행위”정치권에서 나오는 ‘제3지대론’의 가능성은.반기문 혹은 문재인 대세론이 그대로 간다면 나머지 후보들은 각자 진영에서 “여기서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여길 수 있다. 가령 손학규 전 의원이 문 전 대표와 겨뤄봐야 결과가 뻔하다고 하면 새로운 길을 갈 것이 아닌가. 뭘 하고 싶은데 오갈 데 없는 어려움에 봉착한 세력들이 새로운 길을 도모한다면 다른 진영과 합해 제3지대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i> 끝으로 그에게 사형제 폐지를 못 이룬 채 국회를 나온 소회를 물었다. 유 전 의원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나중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4년4개월을 복역했다. 사형선고 순간 유 전 의원이 “공산국가 건설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라니 정말 웃기고 자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말이나 그의 어머니가 당시 깜빡 졸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i>사형제 폐지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국회를 떠났다.17대와 19대 모두 의원 과반(17대 175명, 19대 172명)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발의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은 컸다고 본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사형제는 없어질 제도’라는 인식을 심었다. 내년이면 우리나라가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지 20년이 된다. 사형제 폐지는 시간문제다. 사형은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하는 또 하나의 살인 행위다. 국가가 살인까지 할 권한을 지니고 있는가.
글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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