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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놀음의 참패

한국 사회 4년 좌우하는 총선에서 ‘필독서’ 되지 못한 여론조사… 언론·업체·제도 모두 질 낮은 결과 생산의 공범
등록 2016-04-21 15:35 수정 2020-05-03 04:28
한국에서 선거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1987년부터였다.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2007년에 조사원들이 전화로 선거 여론조사를 하는 모습. 박승화 기자

한국에서 선거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1987년부터였다.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2007년에 조사원들이 전화로 선거 여론조사를 하는 모습. 박승화 기자

경마장에는 1천원짜리 몇 장에 파는 필독서가 있다. ‘경마지’다. 초보에겐 필수다. 날쌘강호, 갈색바람, 수퍼럭키 등의 이름을 가진 경주마 정보가 가득하다. 우승 예상마도 나온다. 참고는 되겠지만 경마지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없다. 늘 그렇듯 예상은 빗나가기 쉽다. 푼돈을 걸었다면 별 문제가 없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문제는 판돈이 크게 걸렸을 때다.

4년에 한 번씩 13일 동안 열리는 경주가 있다.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다. 후보들은 목이 쉬고, 병원을 드나들며, 하루 네다섯 시간밖에 자지 못한 채 선거운동을 한다.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지지만 유권자는 그들을 잘 모른다.

그나마 눈길이 가는 것은 여론조사다. 언론과 각 정당은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낸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31일부터 4월10일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여심위)에 등록된 여론조사는 총 557건이다. 11일 동안 하루 평균 50여 차례 여론조사가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또 쉽게 빗나갔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총선이 끝난 다음날인 4월14일 새벽,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론조사 업계를 대신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글을 올리며 정치권 등에 여론조사 제도 개선을 당부했다.

10% 이상의 오차

최근 이뤄진 여론조사 결과와 실제 총선 결과를 비교해보면 사과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서울 용산구는 새누리당을 탈당한 더불어민주당의 진영 후보가 출마해 많은 관심을 받았다. 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4월8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진영 후보의 지지율은 30%였다. 상대 후보인 황춘자 새누리당 후보의 지지율은 38.1%로 진영 후보를 앞섰다. 결과는 달랐다. 총선에서 진영 후보는 42.8%를 얻어 39.9%를 얻은 황춘자 후보를 이겼다.

서울 영등포을도 마찬가지다. 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4월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신경민 더민주 후보가 25.1%, 권영세 새누리당 후보가 35.2%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신경민 후보가 41.1%를 얻어 37.7%의 득표율을 기록한 권영세 후보를 이겼다. 여론조사에서 10.1%포인트 차이로 지던 후보가 3.4%포인트 차이로 이기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변이 연출된 곳에서는 더 큰 차이가 났다. MBN이 리얼미터에 의뢰해 4월3일 발표한 서울 강남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김종훈 새누리당 후보(45.2%)가 전현희 더민주 후보(30.1%)를 15% 넘는 차이로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전현희 후보가 51.5%의 표를 얻어 44.4%를 득표한 김종훈 후보를 비교적 큰 차이로 이겼다.

수도권을 떠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경남 양산에선 서형수 더민주 후보가 40.3%를 얻어 38.4%를 기록한 이장권 새누리당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이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4월1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서형수 후보(17%)가 이장권 후보(35.6%)의 절반 이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왔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격전지로 분류되거나 이변이 연출된 지역구의 여론조사는 큰 폭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집전화 중심의 여론조사, 여론조사 대상의 대표성 등의 문제 때문에 여론조사 정확성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여론조사업체 ‘리서치플러스’의 임상렬 대표는 “휴대전화로 조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대선 같은 전국적인 선거가 아니면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총선은 지역번호가 있는 집전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여론조사 대상자의 대표성에 문제가 생긴다”라고 전했다. 집전화를 주로 받을 수 있는 연령층이나 직업을 가진 경우 비교적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만,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직장인의 여론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를 낮에 하면 보수 성향의 응답이 높아지고, 밤에 하면 진보 성향의 응답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여론조사를 거부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임 대표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여론조사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관심이 적으면 여론조사 전화가 와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관심이 많으면 여러 고민을 하다가 거부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적극적인 투표층이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아 실제 결과와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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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폭 넓히고 정확성 기해야

여론조사의 정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심번호’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안심번호는 자기 전화번호를 노출하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번호다. 이동통신사에서 ‘010’으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050’으로 시작하는 임의의 번호와 연결해주는 방법이다. 주로 택배나 대리운전 등에 쓰여왔다. 이동통신사는 가입자의 주소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별 조사가 필요한 총선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선관위는 안심번호를 정당에만 제공하고 있다. 당내 경선에 활용하거나 정당 활동을 위해 여론 수렴이 필요할 경우에만 안심번호를 활용할 수 있다.

이택수 대표는 안심번호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부정확한 여론조사가 가져오는 문제점은 상당히 크다. 지지율이 높은 후보를 더 지지하는 심리를 만들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일으키는 등 실제 투표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젊은 층과 직장인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안심번호 조사를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심번호라고 해도 수많은 개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여론조사업체에 넘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중선관위 관계자는 “대표성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여론조사에 안심번호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안심번호가 사용된 실태 등을 점검한 뒤 개선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문제가 모두 불가피한 제도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여론조사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다. 지상파 3사(KBS·MBC·SBS)가 이번 총선에서 진행한 출구조사는 꽤 정확했다. 여소야대의 의석수도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했고 지역구 당선자들의 득표율도 여론조사와 같은 큰 편차를 보이지 않았다. 지상파 3사는 이번 출구조사에 조사원 1만2500여 명을 투입하고 65억원의 비용을 들였다. 자문에는 중선관위 여심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영원 숙명여대 교수(통계학) 등 여러 전문가들도 참여했다.

김영원 교수는 “비용을 들이면 여론조사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 심층적인 여론조사와 무응답층의 대답을 최대한 얻어내는 노력 등을 기울이면 된다. 하지만 많은 여론조사가 너무 쉽게 이뤄지고 있다. 출구조사에 들이는 노력에 몇십분의 일만 들여도 여론조사의 정확도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비용을 부담하려 하지 않는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여론조사를 주로 의뢰하는 언론사들이 문제다. 일단 숫자만 나오면 방송이 되니까 조사 방법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보도를 통해 해당 업체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광고 효과가 있다며 100만원에 여론조사를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정확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여론조사가 돈벌이가 되니까 부실한 업체들이 선거철마다 우후죽순 생긴다. 자동응답시스템(ARS) 방식의 여론조사의 경우 컴퓨터 한 대와 통계학을 아는 직원 한 명만 있으면 가능하다. 질 낮은 여론조사가 마구잡이로 생산되는 구조다”라고 덧붙였다.

부실한 보도 행태도 한몫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도 언론의 책임을 지적했다. “경마식 보도 행태가 문제다. 언론은 선거 때 국민에게 각 후보자들이나 정당이 어떤 정치적 목표와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소개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같은 역할은 방기하고 숫자만 보여주는 보도에 집중한다. 정확하지도 않은 여론조사 결과를 마치 최신 정보인 것처럼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최 교수는 “여론조사 결과가 투표에 많은 영향을 주는 만큼 부실한 여론조사 결과를 반복해서 내놓는 업체가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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