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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용두사미로 끝난 필리버스터, 말들의 향연에 울려퍼진 책들에서 발견한 인문학… 감시의 해악을 고발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리틀 브라더> 그리고 시(詩)
등록 2016-03-08 13:50 수정 2020-05-02 19:28

테러방지법이 통과됐다. 2월23일~3월2일 192시간37분 동안 ‘테러방지법의 부당함’을 알리는 말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말들은 무거웠다. 말들은 때로 신랄했고, 비감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정치’에 상처받고 냉소해왔던 사람들은 ‘무제한토론’이라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오랜만에 ‘정치’로부터 마음을 치유받는 경험을 했다.
다만 말들의 향연을 끝내고 퇴각하는 길은 몰지각했다. 192시간여 동안 응원하고 지지했던 이들의 마음은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 필리버스터를 주도한 야당 지도부는 ‘자유의 문제’를 ‘안보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끝내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장에게 견제 장치 없는 ‘감시 권한’을 주는 독소조항을 품은 채 원안 가결됐다.
테러방지법과 국정원에 대한 책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2월24일 필리버스터 4번째 주자로 국회 본회의장에 섰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국가 정보기관이 연루된 과거사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마감하며 2007년 펴낸 종합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며 국가정보원과 테러방지법을 비판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2월24일 필리버스터 4번째 주자로 국회 본회의장에 섰다. 그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국가 정보기관이 연루된 과거사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마감하며 2007년 펴낸 종합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며 국가정보원과 테러방지법을 비판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임은 가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야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의회주의에 상처받은 비통한 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192시간37분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결국 필리버스터의 의미는 이미 통과한 ‘테러방지법의 해악과 문제점’에 대해 함께 숙의하고 뜻을 모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국회의원 38명은 필리버스터 연설 중 테러방지법이 어떻게 국민의 일상적 자유를 옥죌지, 테러방지법이 결국 누구를 겨냥할지 등을 말하며 여러 자료와 책들을 인용했다. 인용된 책들은 크게 두 줄기로 나뉜다. 테러방지법으로 일상화될 감시의 위험성을 예견하거나 직관하는 책, 그리고 테러방지법 시행으로 인해 영장주의에도 반하고 헌법에도 반하는 방식으로 견제 없는 권한을 갖게 될 국가정보원이 이미 저질러온 만행들을 기록하는 책이 그것이다.

테러방지법의 대표적 독소조항은 제9조다. 국정원장에게 테러위험인물에 대해 영장 청구 절차 없이 출입국 기록은 물론 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기록을 수집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준 조항이다. 필요한 경우 국정원장은 역시 아무런 선행 절차 없이 ‘테러위험인물로 의심할 가능성이 상당한 사람’에 대해 금융거래 지급 정지 조치도 할 수 있다. 그 인물의 개인정보는 물론 위치정보까지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감시 및 정보수집’ 전후에 국무총리가 맡게 될 국가테러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보고만 하면 된다. 현 정권하에서 보건대, 국무총리는 대통령과 한 몸이며, 국정원 역시 대통령만 바라보는 조직이기에 국가테러대책위원회와 국정원이 현 법제도 아래에서 이해를 달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런 상황을 미래적 관점에서 그려내는 책은 서기호 정의당 의원이 소개했던 코리 닥터로우의 공상과학(SF) 소설 (아작 펴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마커스 얄로우는 학교, 거리를 불문하고 전방위적인 감시가 일상화된 매일을 살고 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표준 노트북인 ‘스쿨북’은 학생들이 입력하는 모든 글자를 기록하고, 인터넷으로 오가는 의심스러운 단어를 검열한다.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감시하고 네트워크로 주고받는 모든 생각을 추적했다. 학교 곳곳에는 걸음걸이를 인식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보조인식 카메라가 빼곡하게 설치돼 있다. 학교를 땡땡이쳐도 조심해야 한다. 길거리에는 무단결석 학생들을 찍어 올리는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기 좋아하는 가게 주인들이 널려 있다. 마커스는 이 모든 감시 체계를 각종 기기와 기술로 교란해 사생활의 자유를 얻는 데 익숙한 ‘IT 소년’이다. 스쿨북 프로그램을 해킹해 스쿨북에 깔린 감시 체계를 무력화하고, 자갈을 넣은 신발을 신어 보조인식 카메라를 교란시키는 행위는 그의 ‘사생활’과 ‘자유’를 위한 것이지 ‘테러’를 위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감시는 반대 의견을 잠재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베이교가 폭파되는 실제 테러가 발생하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정상’을 지향하고 ‘이상’을 감지하는 감시가 더욱 일상화됐다. 마커스는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거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와이파이 탐지기 등을 갖고 다닌다는 이유로 국토안보부에 억류됐다. 이 공간에서 마커스는 영장 없이 ‘테러 위험 인물로 의심받고’ 휴대전화, USB 메모리 등 그의 사적인 모든 일상이 저장된 기기들을 빼앗기고 암호를 불러줘야 했다.

“놈들이 내게서 사생활을 조금씩 빼앗아가고 있다. (중략) 처음에는 사생활, 그리고 다음엔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갔다. 나는 어떤 서류에라도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링컨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자백서였더라도 서명했을 것이다.”

억류가 풀린 뒤에는 ‘대중교통 이용 경로가 의심스럽다’며 경찰서에 가서 조사받아야 했다. ‘도대체 왜 내 교통카드를 이용해서 ‘나의 비표준적인 승차 유형’을 감시하는 건가?’라는 질문은 목구멍 속에서만 맴돌 뿐이다.

이런 감시의 해악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 국가안보국(NSA)의 문서를 폭로한 사건을 영국 일간지 을 통해 보도했던 프리랜서 기자 글렌 그린월드가 그 전말을 쓴 책 (모던타임스 펴냄)는 ‘감시의 해악’을 드러낸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NSA가 미국 최대 통신사업자 가운데 하나인 버라이즌의 미국인 고객 수백만 명의 통화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는 문서를 공개했다. 법원의 일급비밀 명령을 근거로 NSA가 한 ‘전방위적 통화 기록 수집’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NSA는 ‘프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세계적 정보기술(IT) 기업의 서버에 접속해 해당 기업의 사용자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기도 했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전방위적 감시가 현실이며 자행되고 있다는 폭로는 NSA의 이런 조치를 승인했던 미국의 ‘애국법’ 위헌판결을 끌어냈다.

국정원 개혁 조치가 먼저다

는 이런 전방위적 감시가 미치는 부작용을 조목조목 예시한다. “정부가 모든 사람의 행동을 감시할 때는 단순히 반대 운동을 조직하는 일도 어렵게 된다. 대규모 감시는 더 깊고 더 중요한 곳에서도 반대 의견을 잠재운다. 그곳은 다름 아닌 정신이다. 사람들은 단지 정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 생각하도록 훈련된다.”

매카시즘이 활개치던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라 감시당했던 할리우드 극작가 월터 번스타인은 당시 계속 가명으로 일해야 했다. 번스타인은 감시당한다는 생각에 따른 억압적인 자기검열에 대해 말했다. “모두가 조심했다. 위험을 무릅쓸 때가 아니었다. …‘무모하게 목을 내밀지 말라’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다.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돕거나 자유롭게 생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항상 자기검열을 하고, ‘아냐, 하지 않을 거야. 되지도 않을 거고, 정부와 멀어지게 할 거야’ 같은 말을 할 위험이 있었다.”

스노든이 NSA의 전방위적인 통신정보 수집 실태를 폭로한 뒤 미국 작가 모임인 펜아메리카가 2013년 11월 NSA 폭로 사태가 회원들에게 미친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월터 번스타인의 묘사와 흡사하다. “여러 작가가 현재 ‘자신의 통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표현의 자유를 축소하고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제한’하는 식으로 행동을 바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응답자 중 24%는 의도적으로 전화나 전자우편 대화에서 특정 주제를 피했다.”

이 모든 상황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의 국정원은 ‘첨단 기술’을 통한 감시는 아니지만 무분별한 감시·감청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2004년 국가 정보기관이 연루된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해 발족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3년간의 활동을 담은 (국가정보원 펴냄)는 부일장학회 헌납 및 매각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및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KAL 858기 폭파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 국정원의 권력 남용으로 개인의 자유는 물론 생명까지 훼손당했던 사건들의 전모를 밝힌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이 사건들을 언급하며 “테러방지법보다 국정원 개혁이 먼저”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국정원의 ‘권력 남용’과 ‘인권침해’는 계속되고 있다. 신경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책 (비타베아타 펴냄)에서 상세히 기록했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진행 상황, 국정원 임아무개 과장의 의문의 죽음 등에 대해 말했다. 신경민 의원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정원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의 권한을 제약하고 개혁하는 조치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소설 같은 국가의 ‘폭력적 감시’가 재현·반복되는 현실 혹은 미래를 직관하는 것은 결국 시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1979년 김남주 시인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친구 김남주의 시 ‘진혼가’를 비장하게 읊었다.

“총구가 내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신념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신념 나의 싸움은 미궁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발가락이라도 핥아주겠노라”

테러방지법이 ‘만연한 감시’로 인해 신념과 싸움을 구부러뜨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다수가 침묵한 이후의 세상

최민희·정청래·이학영 무려 3명의 의원들이 아프게 읊은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침묵하는 다수’로 구성된 우리의 미래를 조감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애초 아돌프 히틀러의 지지자였다. 이후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고백교회’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도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답은 침묵하지 않는 것,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는 가장 좋은 무기”이기에, 그 ‘공포’를 정부가 행사하는 일을 막는 것이다.




‘테러방지법’  192시간  필리버스터에서  인용된  책과  시



  박원석(정의당)
 박원석(정의당)
  은수미(더불어민주당), 최민희(더불어민주당), 김경협(더불어민주당), 정청래(더불어민주당)
  신경민(더불어민주당)
  서기호(정의당), 박원석(정의당)
  서기호(정의당)
  권은희(더불어민주당)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이학영(더불어민주당)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학영(더불어민주당)
김남주 ‘진혼가’ ‘잿더미’  이학영(더불어민주당)
김지하 ‘1974년 1월’ ‘타는 목마름으로’  이학영(더불어민주당)
하인리히 하이네 ‘당나귀 선거’ ‘슐레지엔의 직조공’  이학영(더불어민주당)
신석정 ‘꽃덤불’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마르틴 니묄러 ‘그들이 처음 왔을 때’  최민희(더불어민주당), 정청래(더불어민주당), 이학영(더불어민주당)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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