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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이용하라, 뭐든지 하겠다”

문재인 대표의 입당 제안 받아들인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장 인터뷰 “박근혜 정부는 독재이자 경직된 권위주의”
등록 2016-01-05 05:44 수정 2020-05-02 19:28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5년 12월27일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의 영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15년 12월27일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의 영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말을 잠깐 멈췄다. 짧은 찰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치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가족의 반응을 물은 직후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때 홍역을 치렀고 힘든 일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시 그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며 선거 직전 경찰대 교수직을 내놓았다. 그 자신의 표현처럼 “철밥통 교수직을 버린” 선택이었다. 이제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그에게 아내는 “정치를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잘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우리는 괜찮으니 까짓것 해봐, 아빠”란 딸의 반응을 전하면서 그는 잠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당, 물이 들어온 배와 같아

옛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안철수 의원이 신당 창당의 비전을 제시한 당일(2015년 12월27일), 문재인 대표는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의 영입을 발표했다. 문 대표는 201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인물 혁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외부 인사 1호로 표 소장을 영입했다. 2015년 마지막 날, 표 소장을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정치인이 된 뒤) 변하지 말라”는 당부를 많이 듣는다는 그는 “신사의 품격과 전사의 용맹을 갖춘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도와달라”는 문 대표의 말에 정치를 하지 않으려던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더 이상 비겁해지기 싫어서 문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정치를 하면 (당장) 잃을 것들이 있었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뒤 세운 범죄과학연구소가 본궤도에 올라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방송 프로그램 에 출연하고 있었다. 여러 방송 섭외도 받은 상태였다. 소설 출간도 예정돼 있다. 201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중학교 자유학기제(학생 참여형 수업)를 통해 ‘추리 교실’도 진행할 계획이었다. 이런 상황을 문 대표에게도 말했다. 그런데 문 대표가 야당의 상황을 얘기하며 “절박하다. 도와달라”고 했다.

이걸 거절하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겠더라. 야당 상황은 이미 물이 들어온 배와 같아 (여기에 합류하면) 나도 함께 침몰할 수도 있고, 욕을 들을 수도 있다. 정치를 하더라도 야권 분열 상황이 다 정리되고, 나의 상황도 정리한 뒤에 하면 좋겠지만 그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유불리를 따지면 (문 대표에게) 왠지 ‘갑질’을 하는 것 같았다.

2014년 7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들로부터 출마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두 대표도 절박한 상황에서 제안했을 텐데.

내가 보기엔 그렇게 절박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그땐 세월호 참사 이후라 야권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재·보궐 출마지도 야권 우세 지역이 많아 (내가 출마하더라도) 뭔가 혜택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땐 방송에 출연하면서 글을 쓰고, 기업·정부기관·학교 강연 등을 통해 (야권의) 외연을 확대하고 합리적 사회로 변화시키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당에 들어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입당하면서 야당 상황을 ‘최악’이라고 표현했는데.

새가 날기 위해선 좌우의 날개가 필요하듯 정치도 경쟁 관계가 있어야 (집권 여당이) 독재로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야권이 무너지고 있다. 국민들은 정신 붕괴 상태다. 내가 이 당을 살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부터 이 당에 들어가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기존 계파와 지역 구도·편 가르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합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분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다.

야구에서 구원투수의 투구 수는 제한돼 있다. (내가 입당해서) 6회와 7회를 가까스로 잘 막았다 해도 8회부터 (상대 역공을 받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른 분이 더 합류해 이 동력을 이어가야 당이 살아날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문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인 뒤 문 대표와 가까운 사람으로 분류될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친노(무현)’와 ‘친문(재인)’이라고 하면 뭔가 음습하고 문제가 있는 듯한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그건 언론·방송·여권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프레임이다. 상대가 씌운 덫에서 도망칠 필요가 없다. 움츠러들고 자꾸 ‘난 (친문이) 아니다’는 식으로 대응하면 (상대가 그렇게 공격하는 걸) 더 재미있어한다. ‘그래 친문이다, 어쩔 건데?’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프레임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문 대표의 장점은 살리면 되고, 지적받는 부분은 (문 대표가) 수용하고,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면 된다.

지역구 출마와 비례대표 중 어떤 것에 더 관심이 있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의원이 되지 않더라도 당에서 보직을 맡아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당원을 다독이고, 당의 외연을 확대하고, 야권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문 대표에게도) 그런 말을 했다. ‘우리 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날 최대한 이용하시라. 난 뭐든지 하겠다’고.

입당하면서 정치를 시작하는 이유 10가지(정의 실현, 안전 확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꿈과 행복을 주는 일 등)를 밝힌 바 있다. 차기 총선에서 원내로 들어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

정권 교체다. 이것이 실현되면 내가 말한 10가지도 실현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공정한 환경에서 자라고, 무너진 사법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며 경찰대 교수직을 그만뒀다. 국정원·경찰 개혁에도 관심이 있을 텐데.

국회에 들어가게 된다면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 것이다. 이 문제는 오래갈 싸움이다. (대선 개입에 대한) 일종의 혐의들을 모으고, 정권이 교체되면 그 단서에 기반한 증거를 토대로 진상 규명에 나설 것이다. 국정원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다. 민주적 통제 장치가 있어야 한다. 국정원은 해외 정보 분야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국정원·경찰·군 등에 흩어져 있는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을 한 기관에 흡수시킨 뒤 이 기관이 정치 도구화되지 않고 국가안보에 집중하는 기관이 되도록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경찰도 권력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다. 역시 경찰 지휘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경찰 내부의 강고한 카르텔(동맹)을 깨는 혁신은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다. 내가 정치를 시작했다는 것은, ‘경찰을 뜯어고치는 데 성공할지, 내가 뜯겨서 나갈지’에 대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된다.

신사의 품격과 전사의 용맹을 가진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는데.

막말, 비합리, 몰상식, 편가르기,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 등이 정치를 외면하게 만든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논쟁하고 설득하면서 어떤 것이 옳은지 제시해야 한다. 결정은 주권자(국민)에게 맡기는 것이다. 상식과 합리, 논리와 분석, 치밀한 준비와 노력의 결과물이 ‘신사의 품격’이다.

하지만 나 혼자 매너가 있으면 무슨 소용 있나. 위선과 위장, 술수, 거짓 선동을 위한 카르텔을 깨뜨려 (그 실체를) 주권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깨뜨리는 용맹함이 필요하다.

정치인에겐 균형감도 중요하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형,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와 현실 사이의 균형 등이 필요하다. 너무 깨끗한 척하면 상대를 악으로 보게 된다. 그렇다고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 원칙이 무너질 수 있다.

만약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그런 균형감이 있었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협정 결과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신사의 품격’과 ‘전사의 용맹’이란
표창원 소장이 2015년 12월30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합의 반대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표창원 소장이 2015년 12월30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합의 반대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박근혜 정부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핵심은 독재다. 이 표현이 싫다면 경직된 권위주의라고 바꿔줄 수도 있다. 과거처럼 고문으로 사람을 때려잡는 게 아니라 소통과 정치를 하는 방식에서 일방통행을 하고 있다. 여당은 최고 존엄으로 여기는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말을 못하고 있다. 위에 있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그분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과감한 행동을 못하는 것 때문에 세월호 참사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도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밑에 있는 사람이 이걸 깨줘야 한다. 조선시대에 임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건 아닙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라고 했던 선비들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임금 앞에서 그렇게 했었는데 지금은 (여권에선) 그만큼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당을 탈당한 안 의원의 최근 행보, 문 대표 사퇴를 요구해온 이른바 ‘당의 비주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완곡한 표현으로 기사에 실리길 원했다. 결국 야권 통합이란 이름으로 만날 사이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다듬어달라고 했다.

“(안 의원이 탈당하고, 문 대표에 대한 비주류 쪽이 사퇴를 요구하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현재 들어간 당의 대표가 문재인 대표이니 (나는) 그와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갈 것이다. (안 의원, 천정배 의원 등도) 잘되었으면 한다. 결과적으로 우린 통합해야 하는 파트너이니 서로에 대한 비난도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는 “안 의원과 천정배 의원 등이 나를 문재인 사람으로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의 언행을 통해 ‘저 사람(표창원)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주고, 혹시라도 (야권통합을) 중재할 여건과 영향력이 나에게 생긴다면 그 역할(중재)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민의 뜻과 함께하면 폭발적 힘”

그는 2015년 마지막으로 열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석했는데, 이날의 경험이 정치인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날 한-일 협정 결과와 소녀상 이전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7시간 이상 현장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한-일 협정 결과는 참담하다. 분노도 느낀다. 그런데 여당 의원들, 정부 관계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야당도 일부 의원만 있다 갔다. 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 국회에서 법과 제도를 논하는 것인데, (시민이 있는) 현장에 정치인이 없다. 물론 나도 모든 곳에 다닐 수는 없겠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많이 갈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내가 대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이 이야기에 시민의 뜻이 함께하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인=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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